- 고통스러웠지만 행복했던 순례의 기록
: 까미노 제6일 차 (From Puente la Reina to Estella, 21.9 km; Sept 25, 2017)
아침 8시, 어제의 고단함과 감동을 뒤로하고 '여왕의 다리'를 나섰다. 어젯밤, 지친 나에게 따뜻한 위로가 되어주었던 이탈리아 의사 친구, 빈시엔소(Vincenzo)가 오늘 나의 동행이 되어주었다. 우리는 나란히 여왕의 다리를 건넜다. 수백 년 전, 각기 다른 길을 걸어온 순례자들을 하나로 묶어주었던 바로 그 다리 위에서, 이제는 이탈리아에서 온 의사와 한국에서 온 내가 함께 걷고 있었다. 다리 위에서 바라본 아르가(Arga) 강의 고요한 물결은, 우리의 새로운 여정을 말없이 축복해 주는 듯했다.
하지만 순례길은 결코 낭만만을 허락하지 않는다. 어제 나를 괴롭혔던 발가락과 발뒤꿈치의 통증이 다시 어김없이 찾아왔다. 결국 나는 무거운 등산화를 배낭에 매달고, 며칠 전 팜플로나에서 신었던 샌들을 다시 꺼내 신었다. 샌들을 신고 울퉁불퉁한 흙길을 걷는 것은 발바닥에 더 큰 무리를 주었지만, 통증을 피할 다른 방법이 없었다.
바로 그 순간, 나는 이 길의 본질을 깨달았다. '힘들고 거칠고 아프지 않으면, 그건 카미노 순례길이 아니다'. 어쩌면 사람들은 이 길 위에서 무언가 쉽고 빠른 깨달음을 얻으려 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쉬운 길'을 속삭이는 이들은 모두 '거짓 선지자'일뿐이다. 진정한 순례는, 지금 내 발바닥이 느끼는 이 고통과 거친 흙길 위에 있었다.
그렇게 고통을 곱씹으며 붉은 흙먼지 날리는 길을 걷고 있을 때, 길은 예상치 못한 위로를 건네기도 했다. 한 청년이 도네이션 베이스로 운영하는 작은 가판대가 나타난 것이다. 그 앞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The Best Moment of THE DAY, is in The WORST..." (하루 중 최고의 순간은, 가장 최악의 순간에 있다...). 나는 이마의 땀을 닦으며 시원한 수박과 바나나를 집어 들고 기꺼이 도네이션을 했다. 이 청년이야말로 진짜 순례자가 아닐까. 길 위에서 1000년이 넘었다는 오래된 샘물을 만나 목을 축이고, 고대 로마인들이 만들었다는 수로를 지나는 모든 순간이 고통 속에서 발견한 작은 기쁨이었다.
길은 끝없이 이어졌고, 오후 1시가 되도록 중간에 먹을 곳이 마땅치 않았다. 배고픔과 피로가 뒤엉켜 한계에 다다를 무렵,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작은 바(Bar)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빈시엔소와 함께 자리에 쓰러지듯 앉아 미트볼과 엔초비 올리브, 그리고 시원한 '에스트렐라 갈리시아' 맥주 한 병을 주문했다.
"살았다...!"
따뜻한 미트볼 한 조각과 얼음처럼 차가운 맥주 한 모금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순간, 온몸의 세포가 다시 살아나는 기분이었다. 정말이지, 그 미트볼과 맥주가 나를 살렸다.
출발한 지 7시간 만에 마침내 오늘의 목적지 에스테야(Estella), 일명 '별처럼 빛나는 도시'에 도착했다. 아침에 미리 예약해 둔 '아고라 호스텔(Ágora Hostel)'에 짐을 풀고 뜨거운 물로 샤워를 했다. 젖은 몸이 마르자, 낯선 도시에 홀로 남겨진 이방인의 쓸쓸함이 밀려왔다. 근처 바로 나와 와인 한 잔을 시켜놓고 이 쓸쓸한 월요일 오후를 견디고 있었다.
문득, 이 도시의 역사가 떠올랐다. 에스테야는 우연히 생긴 마을이 아니었다. 11세기말, 나바라의 왕 산초 라미레스(Sancho Ramírez)가 오직 산티아고로 향하는 순례자들을 위해 의도적으로 세운 도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수백 년 전, 최초의 순례자 가이드북은 이곳을 "좋은 빵과 훌륭한 와인, 풍부한 고기와 생선, 그리고 온갖 행복이 가득한 도시"라고 예찬할 정도였다고 한다.
수백 년 전 순례자들에게 '온갖 행복'을 주었다는 바로 그곳에서, 나 역시 방금 전 한 접시의 미트볼과 차가운 맥주 한 병으로 '구원'을 받지 않았던가. 화려한 교회와 궁전이 많아 '북쪽의 톨레도'라 불렸던 이 도시는, 예나 지금이나 지친 순례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내어주는 '순례자의 천국'이었던 셈이다.
쓸쓸함이 조금 가셨다. 어제 팜플로나에서 짐을 부치지 못해 안절부절못하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Let it go --- Period.' 그래, 그깟 짐이 뭐라고. 이렇게 아프고, 배고프고, 또 살아나고, 때론 쓸쓸해하며 수백 년 전 순례자들의 발자국을 그대로 밟고 있는 것. 그것이 순례길의 전부인 것을.
그날 저녁, 나는 미리 약속한 대로 이태리에서 온 닥터와 저녁을 함께했다.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구체적인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거의 한 시간 반 이상을 맛있는 에스테이야의 저녁 식사를 앞에 두고 담소를 나누었다. 그기 내게 이렇게 함께 해줘서 정말 고맙다고 했다. 아니 내가 이 외로운 순례길에서 동무가 되어주어 더 고맙다고 했다. 그렇게 나의 길은 쓸쓸했지만, 결코 혼자는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