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스러웠지만 행복했던 순례의 기록
:까미노 제28일 차(O Cebreiro to Triacastela, 21.1km; Oct. 18, 2017)지
10월 18일 수요일. 오 세브레이로의 아침은 신비로운 안개에 잠겨 있었다. 해발 1,400m, 구름 위의 마을을 뒤로하고 길을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아 안갯속에서 거대한 청동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알토 데 산 로케(Alto de San Roque)의 '바람을 맞서는 순례자상'이다.
거센 바람에 모자가 날아갈세라 한 손으로 꾹 눌러쓰고,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지팡이에 의지해 전진하는 그 모습. 그것은 지난 28일간 비바람과 싸우며 여기까지 걸어온 나 자신의 모습이자,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었다. "당신도 그렇게 힘들게 걸어왔군요." 말없는 동상에게 동지애를 느끼며, 나 또한 옷깃을 여미고 그 옆을 지나갔다.
능선을 따라 걷는 길은 뜻밖의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여기 갈리시아 지방에도 가을이 완연하다. 한국과 계절이 비슷한 것 같다".
길 양옆으로 펼쳐진 풍경은 영락없이 한국의 가을 산이었다. 노랗고 붉게 물든 낙엽들이 흙길을 덮고, 서늘하지만 상쾌한 공기가 뺨을 스쳤다. 메세타의 황량함이 주던 고독과는 결이 다른, 풍요롭고 아늑한 가을의 정취. 낯선 스페인 땅 서쪽 끝에서 만난 이 익숙한 풍경 덕분에, 걷는 내내 한국에 있는 가족들과 친구들 생각에 잠겼다. 몸은 멀리 있어도 마음만은 고향의 가을 산행을 하는 듯한 포근함이 걸음마다 묻어났다.
점심 무렵, 허기를 달래기 위해 'Aira do Camiño'라는 식당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나는 너무 반가운 소울푸드를 찾아냈다. 메뉴판에 적힌 갈리시아 전통 수프, '깔도 가예고(Caldo Gallego)'. 하얀 콩과 감자, 그리고 이곳에서 나는 순무 잎(Grelos)을 푹 삶아 낸 국물 요리다.
한 숟갈 뜨는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이건... 시래깃국이다!" 구수한 국물 맛과 푹 익은 푸른 채소의 식감은 한국의 시래기 된장국과 쌍둥이처럼 닮아 있었다. 딱딱한 빵과 짠 하몽에 지쳐있던 한국인 순례자의 위장을 부드럽게 감싸주는 완벽한 위로. 낯선 오지 마을에서 만난 이 따뜻한 국물 한 그릇이 바닥났던 에너지를 다시 채워주었다.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다시 길을 나섰다. 폰프리아(Fonfría)를 지나면서 길은 숲 속으로 깊숙이 이어졌다. 수령을 알 수 없는 거대한 밤나무들이 터널을 이룬 숲길은 동화 속 마법의 숲처럼 신비로웠다.
내리막길을 따라 한참을 내려가니 산 아래 분지에 자리 잡은 마을, 트리아카스텔라(Triacastela)가 나타났다. 옛날 이 마을에 세 개의 성(Tri-Castillos)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지만, 지금은 성 대신 지친 순례자들을 위한 안식처들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오늘은 본의 아니게 일정이 늦어졌는데 숙소까지 예약을 해놓지 않은 상태. 날은 어두워지는데 물어물어 찾아들어간 숙소는 '카사 데 알케미스타(La Casa deL Alquimista - 연금술사의 집)'. '예술가의 집(The artist's house)'이라는 별칭답게, 숙소 곳곳은 독특한 그림과 장식들로 채워져 있었고 구조나 분위기가 통상적인 알베르게와는 사뭇 다른 그냥 예술가의 작업하우스 같은 곳이었다.
외출 나간 주인이 돌아오기까지 한 참을 기다린 후 이층 룸에 방을 배정받았다. 배낭을 내려놓고 간단히 씻고 짧아진 해를 생각해서 서둘러 빨래를 해서 앞마당에 널었다. 저녁도 마치 생태 공동체처럼 다 같이 준비하고 다 함께 먹은 후 생각것 도네이션 하는 게 전통이었다. 그런 분위기에 익숙하지 않은 나는 그 날밤 분명 이방인 같았다.
특이한 것은 몇 명 되지 않은 그날의 식구들 중에 젊은 한국 여성이 한 사람 있었는데, 나중에 듣고 보니 까미노 순례길에 왔다가 그 스페인 연금술사를 만나 거기에 아예 눌러앉은 경우 같았다. 고개가 꺄우뚱 해졌지만 서로 어색해져서 이후로는 말도 섞지 않게 되었다.
고향을 닮은 가을 풍경과 영혼을 데워준 시래깃국, 그리고 연금술사의 집에서의 불편한 잠자리까지 28일 차의 하루 여정은 거리는 길지 않았지만 약간 혼란스럽고 피곤한 하루 었다. 창밖으로 깊어가는 갈리시아의 가을밤, 내일은 또 어떤 마법 같은 길이 펼쳐질지 기대하며 잠을 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