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스러웠지만 행복했던 순례의 기록
:까미노 제29일 차(Triacastela to Sarria, 18.9 km; Oct. 19, 2017)지
10월 19일 목요일. 트리아카스텔라의 아침, 순례자들은 갈림길 앞에 선다. 왼쪽은 유서 깊은 사모스(Samos) 수도원을 거쳐가는 평탄하지만 긴 길, 오른쪽은 산 실(San Xil)을 넘어가는 짧지만 숲이 우거진 길. 나는 18.9km의 산 실 루트를 택했다. 갈리시아의 깊은 속살을 더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다. 마을을 벗어나자마자 펼쳐지는 좁은 오솔길은 이끼 낀 돌담과 거대한 참나무들이 터널을 이루고 있었다. 마치 '반지의 제왕'이나 동화 속에 나올법한 신비로운 숲, '요정의 숲'이라 불러도 손색없는 풍경이었다.
갈리시아 지방 특유의 농로인 '꼬레도이라'를 걷는다. 소달구지가 지나다니며 자연스레 파인 길 위로 맑은 물이 흐르고, 양옆으로는 돌담이 쌓여 있다. 축축하게 젖은 이끼 냄새와 흙내음이 폐부 깊숙이 들어왔다. 어제 느꼈던 '한국의 가을' 같은 정취가 오늘도 이어졌다. 발에 채는 낙엽 소리와 나뭇가지 사이로 부서지는 햇살. 고요하고 평화로운 숲길을 걸으며 나는 지난 29일간의 여정을 차분히 복기했다.
오후가 되어 숲을 벗어나자, 저 멀리 작은 규모의 도시가 나타났다. 사리아(Sarria)다. 도시 입구에 들어서자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졌다. 그동안의 시골 마을들과 달리 현대적인 건물들이 보이고, 거리에는 활기가 넘쳤다. 무엇보다 알베르게와 식당을 알리는 간판들이 화려하고 많아졌다. "Cocktails", "Pizza", "Free WiFi", "Welcome"... 조용한 수행의 길에서 갑자기 관광지에 떨어진 듯한 낯설음. 하지만 이것 또한 까미노의 일부임을 받아들인다.
사리아는 산티아고까지 약 115km가 남은 지점이다. 이곳이 특별한 이유는 '최소 100km 이상 걸어야 순례 인증서(Compostela)를 받을 수 있다'는 규칙 때문에, 여기서부터 순례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대거 유입되기 때문이다.
거리에는 새 옷과 새 신발, 그리고 가벼운 배낭을 멘 활기찬 사람들이 가득했다. 29일 동안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낡아버린 내 모습과 대조적이었다. 처음엔 그들의 왁자지껄함이 낯설었지만, 곧 깨달았다. 그들에게는 오늘이 설레는 첫날이고, 나에게는 완성을 향해가는 마지막 여정의 시작이라는 것을. 서로 다른 시간대를 걷고 있지만, 결국 우리는 모두 산티아고라는 하나의 별을 향해 가고 있었다.
사리아의 알베르게는 순례자들로 붐볐다. 활기찬 에너지 속에서 맥주 한 잔을 기울이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이제 남은 거리는 두 자릿수. 내일부터는 저 수많은 인파와 함께 걸어야 한다. 고요했던 나의 순례길이 조금은 소란스러워지겠지만, 그 또한 축제의 서막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수백 년 된 돌길과 네온사인이 공존하는 도시 사리아에서, 나는 완주를 향한 마지막 신발 끈을 조여 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