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미노 데 산티아고의 추억에(5)

: 고통스러웠지만 행복했던 순례의 기록

by 디본

5.수비리에서 팜플로냐까지: 진짜 스페인, 그리고 내 진짜 짐의 무게

:까미노 제4일 차(Zubiri to Pamplona, 18.6 km; Sept. 23, 2017)


1) 발가락 통증과 함께 시작하는 아침


수비리(Zubiri)에서의 맑은 아침이 밝았다. 3일 차의 고된 여정 끝에 만난 달콤한 휴식 덕분인지 몸은 한결 가벼웠지만, 문제는 발가락에서 시작됐다. 밤새 욱신거리던 발가락이 결국 말썽을 부린 것이다. 순례길에서 발은 생명과도 같기에, 나는 무거운 등산화를 벗고 샌들로 갈아 신는 임시방편을 택했다.


완벽할 것 같았던 4일 차의 순례는, 이렇듯 작은 상처와 함께 조금은 절뚝이며 시작되었다. 오늘 목적지인 팜플로냐(Pamplona)까지는 총 18.6km. 하루 평균 25km 이상을 걸어야 하는 일정에 비교해 그리 멀지 않은 거리이다.


20170923_193009.jpg 수비리의 맑은 아침 길 - 다시 시작되는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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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가락 통증으로 오늘은 트레킹화 대신 샌덜로 걸어본다


2) 길 위에서 만난 유쾌한 인연들


하지만 순례길은 하나의 문을 닫으면, 다른 하나의 창을 열어주는 듯했다. 발의 불편함도 잊게 할 만큼 유쾌한 인연들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멕시코에서 온 활기 넘치는 친구 레오(Leo)와 캐나다 밴쿠버에서 온 65세의 멋쟁이 맥스(Max) 아저씨. 우리는 '부엔 까미노'라는 인사 한마디로 금세 친구가 되었다. 언어는 조금 서툴렀지만, 땀 흘리며 같은 길을 걷는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공감대가 형성됐다.


중간에 만난 '라 파라다 데 수르하인(La Parada de Zurjain)'이라는 작은 카페는 순례자라면 누구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쉼터였는데 우리는 그곳에 나란히 앉아 아침 10시에 마시는 카페 아메리카노의 여유를 만끽했다. 레오와 맥스의 유쾌한 농담에 웃다 보니, 어느새 팜플로나 도시 입구에 다다랐다. 레오가 찍어준 사진 속의 나는, 아침의 고통은 잊은 채 활짝 웃고 있었다.



20170923_105613.jpg @La Paradora de Zuriain - peregrino's Paradise



20170923_132059.jpg @Villava - at the gate to the Pamplona



20170923_143652.jpg Leo and Max @Pamplona


20170923_151945.jpg Pamplona Old Town 입구


3) 축제 속 이방인, 샌드위치 하나에 얻은 위로


팜플로나의 올드타운은 '진짜 스페인'이라는 표현처럼 강렬했다. 우리가 도착한 날은 마침 도시 전체가 축제 중이었고, 카스티요 광장(Plaza del Castillo)을 중심으로 골목마다 명동보다 더 많은 인파가 몰려나와 떠들썩했다.


20170923_184524.jpg @Plaza del Castillo


길 위에서 느꼈던 고요함과 평화로움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거대한 축제의 물결 속에서 나는 길 잃은 이방인이 된 기분이었다. 저녁 먹을 곳을 찾아 한참을 헤매다 결국 포기하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 허기진 배를 붙잡고 우연히 들어간 'Saint Wich'라는 작은 가게에서 구원처럼 샌드위치를 만났다. 북적이는 인파 속에서 느끼지 못했던 따뜻한 위로가, 소박한 샌드위치 하나에 담겨 있었다. 맛이 괜찮아 내일 점심용으로 하나를 더 샀다.


20170923_211036.jpg Old Towners + Peregrinos @Pampmona Old Town Festival


20170924_031428.jpg Sandwitch가 아니라 Saint Wich ^^



4) 마침내 마주한 내 마음의 짐


숙소로 돌아와 침대에 걸터앉아 무거운 배낭을 내려놓는 순간, 하루 종일 외면했던 질문이 나를 덮쳤다. 바로 내 몸과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는 이 짐들에 대한 것이었다.


출발하기 전 집에서 최대한 줄인다고 줄였는데도, 여전히 내 어깨를 짓누르는 이 무게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것은 단순한 옷가지나 생필품의 무게가 아니었다. 버리지 못했던 마음의 욕심과 미련, 그리고 인생의 짐들이었다. 길 위에서의 고통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 아니라, 내 미련의 무게만큼 정직하게 찾아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20170924_030749.jpg 아직 떨쳐버리지 못한 미련의 짐들 - 빨리 떠나보내버려야 내가 사는 길


결단이 필요했다. 이 짐들을 덜어내야만, 남은 길을 제대로 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창밖을 보니, 내일은 일요일. 우체국도 문을 열지 않을 것이다. 마음의 짐을 덜어내겠다는 결심조차, 당장은 실행에 옮길 수 없는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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