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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그냥 Dec 14. 2017

포스트잇은 왜 안 쓰나요?

입사 첫날, 초보 기획자가 흔히 느끼는 실망감

 반년에 한 번씩 들어오는 인턴인데도, 눈만 떴다 감으면 새로운 인턴이 들어와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다. 새로운 인턴에게 간단히 회사와 업무를 소개해주고 궁금한 점은 없는지 묻는다. 그럴 때면 아주 조심스럽게 어색한 웃음과 함께 매번 비슷한 질문을 받고는 한다. 이제는 내가 먼저 선수 치며 질문을 던져 버린다.


 포스트잇 왜 안 붙어 있는지 궁금하죠?




UX교육과정에 자주 포함되어 있는 어피니티 다이어그램,  : https://www.flickr.com/photos/12557689@N00/5016829583

 언젠가부터 우후죽순 생겨난 UX아카데미나 UX 관련 서적에서는 심심찮게 포스트잇으로 도배한 벽면을 보여준다. 바로 어피니티 다이어그램(AfiinityDiagram)이다.

 2000년대 중후반에 국내에 UX가 처음 전해진 이래로, 어피니티 다이어그램은 마치 UX를 분석할 때의 상징적 모습이 왔다. 사용자의 여러 가지 소리를 친화도에 따라서 묶어내며 고객의 경험과 요구 등을 정리하는 방법론으로 UX의 기본가치에 충실하면서도 비주얼적으로도 인상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입사한 인턴 기획자들은 UX 분석 업무 현장에서 화려한 포스트잇을 붙이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한다. 한 인턴은 아예 다양한 색상의 포스트잇을 구매해서 입사한 경우도 본 적이 있다. 형형색색의 포스트잇만큼 알록달록한 기대치가 어쩐지 공감이 갔다.

나 역시 처음 이 일을 시작할 때 비슷한 기대감이 있었다. 이론적으로 접했던 UT(Usability Test)라고 하는 '사용성 테스트'라든가 그걸 통해서 도출한 많은 아이디어를 가지고 만들어내는'퍼소나(Persona)'를 설명한다든가 하는 모습을 상상하면 너무나 멋있게만 느껴졌다. 그리고 그런 부분을 충실히 하는 것만으로도 멋진 서비스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만 같은 막연한 기대에 부풀었다.  

 아직도 입사 첫날 내가 팀장님께 했던 질문이 생생하다.


우리 회사 UX기획팀도 사용성 테스트를 많이 하나요?


 부푼 신입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팀장님의 답변은 너무나도 실망스러웠다.


아니, 사용성 테스트보다는 기획자 판단을 통해서 일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 짧은 대답의 순간, 나는 역시 대한민국의 현실은 이론을 잘 따라가지 못하는 것 같다고 개탄했다. 책에서 본 것처럼 일하지 않는 것을 보아하니, 듣던 대로 대한민국 UX는 수준이 낮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UX 이론을 이해하고 있는 나만이 마치 고고한 한 마리 학처럼 느껴졌다. 모두가 주먹구구로 일해도 나는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현장을 겪어보지 않은 신입다운 오만함이었다.





  눈 앞의 인턴의 눈빛을 다시 살폈다. 그 눈빛에서 입사 첫날의 나의 얼굴이 보이지는 않는지 들여다봤다. 그 시절의 나에게 내가 그 뒤에 깨달은 것을 설명해주려고 노력했다.



  대학생 때 전략이란 단어가 들어간 수업에서 누구나 배웠던 ‘SWOT 분석’. 컨설팅에서 큰 파워를 일으키는 SWOT이지만, 앉은자리에서 대충 쓰는 대학생 수준의 SWOT은 전략을 도출하기에 턱없이 수준이 낮았다. 억지에 가까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결과를 과연 기업에서 사용할 수 있을까?

 마찬가지로 모든 방법론이나 템플릿이라는 것은 단지 모양에만 맞춘다고 해서 기업에게 의미 있는 결과가 나오는 건 아니다.

 UX의 방법론도 마찬가지다. 아카데미나 워크숍에 참여해보면 오히려 UX 어피니티 다이어그램을 깊이 없이 모양만 갖추고 형식적으로 하게 되는 경우가 더 많았다. 화려한 색감과 비주얼을 자랑하고 여럿이 협업하여 산출물을 내기도 좋아서 대부분의 방법론을 겉핥기로 알려주는 아카데미에서 티 내기 좋은 과정이 되어버렸다. 결국 모양만 배우는 것에서 머무르는 경우가 더 많았다. 이렇듯 방법론이 보조해주는 것은 중요하지만, 결국은 그 과정을 하는 사람 자체의 사고의 힘이 가장 중요했다.




 국내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몇 해 전부터 UX에 큰 위기감을 느낀 국내 기업에서 해외의 UX 컨설팅 회사의 교육을 받고, 큰 프로젝트에 컨설팅 회사를 참여시키기 시작했다. 한 번은 우리 회사의 리더급 직원들도 호주에 있는 아주 유명한 UX 컨설팅 회사에 방문해서 교육에 참여한 적이 있다. 프로그램은 의례 그렇듯이 다양한 UX 방법론에 대해서 전수를 해주는 것 같았다고 한다. 포스트잇도 당연히 쓰고(Affinitydiagram), 커다란 화이트보드에 무언가를 써가며 아이데이션도 하고, 빨간 모자, 파란 모자도 써가면서 회의하는 방법(six thinking hat) 도 익혔다고 한다.

 그런데 세미나실 뒤의 칸막이 뒤로는 컨설팅회사 내의 실무자들을 보고 이상함을 느꼈다고 한다. 포스트잇이 붙은 화이트보드도 없었고, 그들은 아무도 빨간 모자 같은 건 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우리 회사의 임직원이 왜 그들은 이런 방법론을 쓰고 있지 않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때 돌아온 대답은 우문현답이었다.


저희는 이런 방법론을 모두 체화하고 있어서
굳이 순서대로 할 필요가 없어요


 UX 방법론들은 고객 경험을 이해해서 기존의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책을 내기 위한 그 첫 번째 단계에 필요한 보조 수단이다. UX를 분석하여 Pain point를 찾거나 새로운 아이디어를 도출하는 건 서비스 기획의 첫 단추에 불과하다. 진짜 해결책은 방법론이 아니라 철저한 사고를 통해 나온다.

 UX 방법론을 잘 알고 사용하는 것만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UX 가치관을 체화했다면 이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찾아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UX를 분석한 후에도 내부의 정책과 고려해야 할 요소들은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물론 방법론들도 계속 더 많은 부분을 고려할 수 있도록 발전하고 있지만, BCG 매트릭스를 잘 알고, SWOT을 잘 알아도 훌륭한 마케터가 되기 힘든 것처럼 UX 방법론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훌륭한 UX기획자는 어떤 사람인가?


 기획자의 핵심 업무는 해결책을 찾아가는 것에 있다. 해결책은 UI적인 것일 수도 있고 프로세스적인 것일 수도 있고 신기술의 도입일 수도 있다. 이 해결책을 찾기 위해 마인드맵을 그리는 사람도 있고, 어피니티 다이어그램을 그리는 사람도 있고, 데이터 분석을 해보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어쨌거나 해결책을 찾아가는 사고의 과정이 기획자가 익혀야 할 진짜 역량이다.


 UX조직에 대한 평가도 마찬가지다. 이 곳이 실리콘밸리가 아니라고 해서 벽에 포스트잇이 없다고 해서 UX적 해결 과정까지 없는 것은 아니다. 대한민국의 UX기획자들은 오묘한 직무만큼이나 다양한 R&R 속에서 UX적인 해결방법과 실천을 수행하고 있다. 처음부터 너무 실망할 것도 없고, 방법론을 사용하는 곳이라고 너무 기대할 필요도 없다. 조직의 형태와 관계없이 UX의 사상이 체화되어 있다면 기획자 개인의 UX적 역량은 얼마든지 성장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 업무를 UX기획자라는 이름으로 하는 곳도 있고, product owner라는 이름으로 애자일 조직에서 다 함께 수행할 수도 있고, product manager라는 이름으로 수행할 수도 있고 UXdesigner라는 이름이 될 수도 있다. 직접 디자인을 할 수도 있고, 스토리보드나 전략 기획서만 작성할 수도 있고, 퍼블리싱까지 해서 프로토타이핑까지 구현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회사 조직의 R&R과 업무규정의 몫일뿐, 모든 대한민국의 기획자들은 어쨌거나  문제점을 발견하고 해결책을 찾아가고 있다는 점에서는 동등하다.

 이름이나 상세 직무가 어찌 됐든 분석된 UX는 우리가 가진 서비스와 제품을 개선해서 고객에게 더 큰 혜택과 가치를 주고 이를 토대로 서비스, 제품을 구성해나가는 것이 UX기획자라는 이름으로 앞으로 해야 할 일이다.



 그러니까, 부디 사무실에 포스트잇이 없더라도
기획자가 되는 길이 설렘으로 시작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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