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은 왜 하기 시작했어?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답은 이것뿐

by 도그냥


결혼 후 이제 3년 반이 지났다.

나는 주로 밥을 하고 남편은 설거지를 한다.


일이 너무 바쁘거나 내가 너무 지치지 않으면, 난 냉장고의 재료를 이렇게 저렇게 이어가며 밥을 한다.

하지만 최근 한달 넘게 연말 모임과 여러가지 심적인 이유로 집밥을 상대적으로 많이 해먹지 못했다.


동료와 떠들다가 내 인스타그램에 지난 3년반동안 해먹은 다양한 음식들을 다시 보게됐다.

정말 우리 둘이 함께 해먹은 음식이 이렇게 많았나 싶었다. 그리고 문득 미안해졌다.


이렇게 집밥을 해주다가 갑자기 내가 바쁘다고 멈춰서 많은 부분을 책임져주는 남편.

이번 주말은 밥을 좀 해줘야지 마음먹고 장을 좀 봐와서 밥을 차렸다.


햅쌀과 찰보리를 섞어서 밥을 앉히고,

닭을 청주에 재워서 누린내를 제거하고

고구마와 감자, 양파를 넣고

청양고추를 넣은 간장양념을 부어 끓이다가

한참 불려놨던 당면을 넣고 찜닭을 했다.

짬나는대로 햇무를 쫑쫑 썰어서 무생채를 무쳤다.

매콤하게 고춧가루를 팍팍 넣고
멸치액젓과 매실액도 넣었다.


집안에 구수한 밥냄새와 달큰한 간장냄새가 퍼졌다

그때 남편이 생각지도 않은 질문을 던졌다.


여보도 결혼 전에는 음식을 안했지?


맞다. 난 전혀 하지 않았다.

음식이 이렇게 레시피만 보고 해도 되는 쉬운 일인 줄 알았다면, 우리 엄마한테 밥이라도 해줬으면 좋았을걸 매일 후회되는 나다.


응, 결혼 전에는 아예 안했지


내 대답에 남편이 다시 물었다.

근데 결혼하고 왜 음식을 하게 됐어?


그러게, 난 왜 음식을 하게 됐을까?


결혼했기 때문에?
여자라서?
어쩔 수 없이?

아니다-, 의무에 얽매여 분노에 치를 떨며 했던 음식은 없다.

그렇게까지 힘든 날에는 안했다.


그럼에도 내 인스타에는 꽤나 다양한 요리가 담겨있었다.
어쩌면 난, 그냥 잘하고 싶었다보다.

오늘도 그런 마음이었듯이 잘 해주고 싶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대답은 하나인 것 같다.


여보를 너무 좋아해서
음식을 한 것 같아,
내 음식을 먹이고 싶어서-


이 말을 뱉고 나니 마음이 복잡해진다.

남편에게 차마 다 보여줄 수 없는 밖에서의 나의 세상 속 여러가지 마음과 도망치고 싶은 일들, 그리고 그 안에서 온전하지 못하고 쪼개져 있는 나의 순수한 마음들이 갈래갈래 느껴진다.


고작 3년 반만에 순수한 마음이 잠시 의무로 느껴지고 지쳤었다고 말하는 것이 미안해졌다.


오늘에야 다시 차려진 부부의 식탁.

그래, 어쨌든 부부의 식탁은 마음으로 차려진다.

이 한끼를 내가 차리지 않아도 세상의 옵션은 많다.

그럼에도 일부러 시간을 내서 차리는 이 밥상은 표현하기 어려운 부부의 동지애랄까.


보글보글 끓여낸 찜닭


보글보글 끓여낸 찜닭은 사라졌다.

푹 익은 감자와 양념을 밥에 비벼 싹싹 먹을 때 입안에는 짭쪼름하면서도 고소하다.

이렇게 하루만큼 부부의 깊이도 깊어지나보다. 설레고 못보면 미칠 것 같지 않아도
서로 잘 먹이고 잘 해주고 싶은 그런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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