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울보의 Love yourself
6살 때 기억이다.
교회에서 성탄절을 맞아서 학예회 비슷한 발표회를 준비했다. 율동과 성경말씀을 차례로 낭독하는 형태였다. 똘똘한 척 잘하고 건방진 나는 어른들이 이뻐하는 어린이였고 당연히 발표회 단골 출연자였는데 센터 욕심이 다분했던 탓에 센터를 맡았다. 아마 보진 못했어도 분명 내 눈빛이 이글이글 타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콘텐츠였다. 예나 지금이나 단순 암기 못하는 나였지만 센터라서 다른 친구들보다 훨씬 긴 성경구절을 암송해야 했다. 이 암기는 나의 평소의 능력치 밖의 일이었다.
하루하루 고통이었다. 성경구절이 적힌 종이를 들고 못하겠다고 찡찡대고 호들갑 떨며 어떻게 도망칠까 궁리를 하면서 엄청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제일 싫은 건 이걸 해내지 못할 것 같은 내 자신이었다.
개근과 책임감이 엄청 중요한 우리 엄마는 결국 강경책으로 '성경구절 외울 때까지 방에 들어오지마!!' 하는 강경책을 썼고, 난 그 추위에 방밖에서 오들오들 떨며 억지 암기를 했다. 펑펑 터지는 눈물에 글씨가 안보이면 눈물을 훔쳐가며 쿨쩍 거렸다.
'천사가 이르되 두려워 말라 ....'로 시작되는 이 문구는 2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머리속에 이 앞구절이 각인 되어있다. 6살 때 기억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생생한 기억인 것을 보면 어지간히 인상적인 기억이 아닐 수 없다. 물론 발표회도 잘 끝냈지만.
근데 30대의 나는
6살 때와 별로 다르지가 않다.
근데 30대의 나라고 해도 별로 다르지가 않다.
월요일을 앞두고 남편을 붙잡고 찡찡대고 호들갑을 떨다가 또다시 펑펑 울었다. 요즘 온갖 업무와 책임들로 내 능력치를 시험하는 일이 또 발생하고 있다.
다 보란듯이 잘 해내고 싶은데 '못하겠다'는 감정을 넘어서 그냥 이거 개인이 감당 가능한 양이 아닌 것 같다. 10줄이 넘는 말도 어려운 성경구절을 외우던 6살의 나와 완전히 동기화 되었다. 친구들도 내 인생이 3인분이라며 내 기분에 더 부채질을 했다.
정말 한계라면 줄여야하는 걸까? 못하겠다고 손을 들어야 하는 걸까?
바쁜 중에 하지 못하면
한가한 중에는 절대 할 수 없다
-힐러리 클린턴-
힐러리의 전기를 읽은 적이 있다. 가장 충격적인 문구였다. 그 뒤로 항상 바쁘고 한계에 직면하면 저 문장을 생각했다.
난 태생이 부지런하고 기계적인 사람이 못된다. 늦잠과 지각이 거의 생활화 되어있고 멍때리기에도 최적화 되어있다. 근데 욕심이 많아서 내 한계치를 생각지 못하고 일을 저지르기 바쁘다.
지금 한계 상황도 그 때 그 성경암송 센터도 결국 내가 저질러 놓은 것이 확실하다. 자신은 한계까지 몰아부치는 것은 흔히 굉장히 나쁜 성향으로 치부된다. 이 시대의 철학자인 BTS의 지론대로라면 'Love yourself'해야하는데, 난 참 이상한 인간이다.
남편을 붙잡고 울면서 말했다.
"누가 대충해도 된다고, 잘 해내지 못해도 된다고 말해줬으면 좋겠어!"
하지만 말만 이럴 뿐, 솔직한 내 마음은 내가 어떻게든 이 상황을 이겨내고 견뎌내길 바란다. 이미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더 높은 최선을 다 할 수 있길 바란다.
내 눈물이란 그런거다. 내 낮은 능력치에 대한 분노 같은 거다. 힘들어서 못하겠다는 'gg'가 아닌 것 같다.
그냥 기분이나 전환하자며 미용실을 찾았다. 흘러나오는 가요와 손길에 마음을 다독여 갈 때, 심심하지 말라고 받은 잡지에서 토닥임을 받을 수 있었다.
당당한 여배우인 김혜수 언니의 인터뷰였다. 누구에게나 한계가 있을 수 있지만 '최선'에는 한계가 있을 수 없다는 그녀의 말.
문득 위로가 됐다.
스스로를 들들 볶아가며 살아가는 나에게 위로가 되는 느낌이었다. 어떤 이에게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이란게 한계를 늘리기 위해 발버둥치는 모습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물을 펑펑 흘려가면서라도 뭔가 해내고 싶은 욕심이 나의 모습이라면 이 모습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고 싶다.
어쩐지 예쁘게 뿌리까지 염색된 머리가 깔끔해 보인다. 컬이 들어간 내 머리스타일이 여유로워 보인다. 마음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