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기억하는 아빠의 마지막 선물
친정의 김치냉장고가 사망했다.
친정에 있던 김치냉장고의 모터가 멈췄다고 한다. 보통 소모품인 가전제품의 수명이 다 하는 것은 보통은 못내 기쁜 일일 수도 있다. 명목이 없어 바꾸지 못했던 주방 가전을 바꿀 수 있는 건 돈이 좀 들더라도 주부들에게는 명백히 신나는 일일 수 있다.
하지만 엄마는 나에게 메시지 하나를 보냈다.
"김치냉장고 모터가 나가서 새로샀어. 큰거 안사고 있던거만한 거 샀어.
한 12년 잘썼다. 고마워."
명백한 '부고의 메시지'였다. 사진 남겨둔 거 없냐고 물었더니, 이미 다 치워가버려서 미처 사진하나 남겨놓지 못했다고 한다. 단지 김치냉장고 하나가 쓰레기장을 향한 것 뿐인데도, 나는 만 11년을 꽉 채운 가족의 역사 증거 하나가 조용히 시간속으로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어쩐지 짠한 기분이 들었다.
수능을 보던 그 해, 그리고 아빠
김치냉장고가 우리 집에 오게 된 건, 내 수능이 끝난 직후였다.
내가 수능을 보던 해는 2004년. 3월 초부터 때아닌 폭설이 내려서 고3인가보다를 실감했었고 수능시험이라는 불안감에 나는 무척 긴장되어 있었다. 고3이라 모두가 내 눈치를 보느라 나는 정확히는 몰랐지만 부모님의 사이는 전에 없게 안좋았다고 한다. 아빠는 어느 순간부터 일을 하지 않고 있었고, 나는 거기에 대해 어리다는 핑계로 관심을 두지 않고 있었다. 아니, 사실 고3이라는 생각에 괜히 신경쓰고 싶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었다. 내 문제가 더 중요했고, 당장 모의고사가 문제였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수능시험이 다가오고 있었다. 언제나 딸들에게 따뜻했던 우리 아빠는 아침이면 날 자동차로 학교에 데려다 주셨다. 새벽 5시에 일어나 머리만 겨우 감은 딸의 입에 엄마가 해놓은 밥을 먹이고, 무거운 내 책가방을 들고 함께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우리집의 차는 아빠가 전파사를 하던 시절 마련한 파란색 트럭. 아빠는 딸들이 함께 타고 다닐 생각에 일부로 승용차처럼 좌석이 두칸이 있는 트럭을 몰았다. 그 해는 그 차를 탄지도 9년째였다.
독서실 바닥의 카페트에서 옮은 알러지성 결막염으로 매일 아침 퉁퉁 부운 눈에 젖은 물수건을 얹은 채, 나는 아빠 옆자리에 앉았다. 아빠의 썰렁한 농담에도 짜증섞인 어조로 대답만 던져댔다. 그런데 한참을 기다려도 아빠가 시동을 걸지를 않았다. 짜증에 담긴 눈빛으로 아빠를 쏘아보았다. 아빠는 세상에서 가장 당황스런 표정으로 자동차 미등을 켜지못해 끙끙거리고 있었다. 어쩌다 켜진 와이퍼는 끼릭끼릭 소리를 내고 있었고 사랑하는 막내딸앞에서 아빠는 멋쩍은 웃음을 지어보이며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다. 그 때 우리 아빠의 운전경력은 35년도 더 된 상태였다. 나중에 알았지만 알츠하이머가 조금씩 아빠를 좀먹기 시작하고 있었다.
어느날인가부터 아빠는 내가 아주 어린 시절 재채기를 해서 힘들게 끊었다던 담배도 다시 태우고 있었다. 한참을 아파트 복도에 서서 한숨을 쉬며 아파트 뒤의 공터를 바라보고는 계셨었다. 새벽녘에 독서실 앞에서 나를 기다릴 때도 담배를 서너개피 태우신 뒤였다.
"아빠는 담배 왜 다시 피워? 몸에도 안좋은데?"
"담배 피우면 머리가 좀 맑아지는 기분이 드는 것 같아서.."
나는 아빠의 대답이 어이가 없다는 듯 눈빛을 피해버리고는 했다. 아빠는 착하고 다정한 아빠였지만 무능하고 게으르다고 생각했다. 아빠의 여러가지 신호였겠지만 나는 신경쓰려 하지 않았다. 어쩌면 알고 싶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냥 나는 더 불안했다. 더 잘해야지, 꼭 수능을 잘 봐서 자랑스런 딸이 되어야지. 그런 생각만 가득 했다. 독하게 아주 독하게 시험준비를 했다. 매일 매일 모의고사 문제집을 과목당 1회씩 풀고 오답노트를 했고, 2주면 14회짜리 모의고사 문제집이 정확히 과목수만큼 풀어냈다. 전시라도 하듯 내 방 바닥에 문제집을 모두 쌓아놓고 침대를 제외한 모든 방바닥이 문제집으로 가득차게 남겨 두고는 밟고 다녔다.
그렇게 수능을 보았고, 정말 고3 처음 올라 갈 때보다 모의고사 점수보다 50점이 오른 기적같은 점수를 얻게 되었다. 우리 가족은 모두 들떠있었고, 그 점수가 가져다준 '4년 전액 장학금'은 가족들을 흥분시켰다. 누구와 크게 교류도 하지 않던 아빠는 들떠서 아파트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내 자랑을 하고 다녔다. 나는 주책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드디어 무엇이라도 해드린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아빠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똑똑한 전자 엔지니어에서 눈에 띄게 흐릿해진 눈빛과 허름해진 옷매무새. 나가면 쉽게 길을 잃어 목에다가 걸어준 휴대폰. 이제 더이상 운전도 할 수 없었다. 우리집 트럭은 지하주차장에서 조용히 시들어갔다.
방안의 수십권의 문제집을 묶어내고 고3의 흔적을 치워내면서 나는 수십장의 종이뭉치도 발견했다. 종이에는 빼곡히 아빠의 글씨가 적혀 있었다. 잃어가는 기억을 잡아보려고 수십장의 종이에 우리집 주소, 아빠 이름, 가족들 이름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내가 고3을 보내는 동안 나에게 보이지 않은 처절하디 처절한 아빠의 몸부림의 흔적이었다. 머리가 조여들고 인식이 무뎌져가는 육신 안에서 그 똑똑했던 아버지의 영혼은 얼마나 답답했을까. 그리고 그 수그러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기위해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제서야 엄마의 눈도 볼 수 있었다. 남편이 약해져가는 모습을 믿기 싫고 그러면서도 자식들을 데리고 어떻게든 엄마는 필사적으로 버텨내고 있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 장학금이 없었다면 내가 대학에 갈 수 없을 정도로 우리집은 기울어 가고 있었다고 한다. 아직 60세밖에 되지않은 남편의 이른 알츠하이머를 가능성조차 인정하기 싫은 엄마는 많은 돈을 들여 한방치료와 우울증치료 센터를 아빠와 찾았었다고 했다. 여자로서 가족으로서 엄마에게 미안했다.
나의 학생시절은 그렇게 지나가고, 좀 이르지만 성인으로서의 자각이 시작되고 있었다.
아빠의 선물
그러고나서 며칠간 우리 가족은 장학금으로 들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집에 돌아왔는데 그날은 정말 오랜만에 아빠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분명 다른 좋은 일이 있어보였다.
그날따라 아빠는 밖에 나가고 싶었고 휴대폰을 꼭 쥐고 딸과 함께 다니던 거리를 거닐었다. 그러다 문득 내가 일주일에 7권씩 문제집을 사대던 서점에서 행사를 한다는 플랜카드를 보셨단다. 그리고 나와 함께 몇번의 영수증 응모를 했던 것을 기억하셨다고 한다.
그 날은 바로 그 행사가 있던 날이었고, 행사는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그 영수증을 추첨해서 6명에게 경품을 주는 행사였다. 아빠는 사람들이 모인 사이로 걸어들어갔다고 한다.
첫번째 영수증이 뽑혔다. 그 사람은 현장에 없어서 취소가 됐다고 한다.
두번째 영수증이 뽑혔다. 어떤 남자가 뛸 듯이 기뻐하며 나갔다고 한다. 뽑힌 그 남자가 다음번 영수증을 뽑았다.
"당첨자 이름은 '이미준'입니다! 자리에 오셨나요??"
"제가 이미준 아빠 입니다!!!"
아빠는 손을 번쩍 들고 뛰쳐 나갔다고 한다.
그 다음날 우리집에는 하얀색의 심플한 '김치냉장고'가 도착했다. 당시에도 최신형은 아니었지만 반가운 아빠의 선물이었다.
그게 벌써 12년 전이다.
김치냉장고가 함께한 시간
그 뒤로 아빠의 병은 계속 나빠져만 갔다. 우리집 가정경제는 계속 무너졌고 우리는 아파틀 팔아 시장 옆 가파른 골목길에 있던 허름한 친척 소유의 빈집으로 이사를 갔다. 원래 사용하던 낡은 냉장고는 이사간 집에 들어갈 곳이 없어서 버렸고 우리집 김치냉장고는 우리집의 유일한 냉장고가 되었다.
아빠는 이제 밥을 먹고나서도 뒤돌아서면 배가 고프다고 했다. 밥솥째로 밥을 퍼먹어도 밥을 먹은 기억을 하지 못했다. 엄마는 집에서 나서기 전에 반찬들을 만들어서 김치 냉장고에 넣어놨었다. 하지만 아빠는 혼자서는 거기에 반찬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했다.
아빠 혼자 길을 나서면 길을 잃었다. 아빠가 전화로 길이 어디인지 모르겠다고 말하면 온가족은 아빠를 찾아 뛰어다녀야 했다. 아빠가 날 바라보는 사랑의 눈빛은 그대로였지만 난 아빠를 잃을까봐 마음졸이는 날이 더 많아졌다.
아빠의 기억의 조각이 점점 더 많이 잃어가면서 우리는 우리가 살던 집으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과거의 기억은 그나마 또렷했기에 살았던 곳으로 돌아가면 좀 나을 것 같았다. 집주인에게 상의 끝에 전세로 다시 들어갈 수 있었다. 이 때도 김치 냉장고는 우리와 다시 함께했다.
엄마는 이대로는 안될 것 같아 아예 직업을 바꾸기로 했다. 아픈 아빠를 직접 케어하시려고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따셨다. 엄마는 존경스럽게 강한 여자였다.
그나마 휴학으로 여유로웠던 대학생인 나는 이런 엄마를 대신해서 아빠를 돌보는 날이 많았다.이제 밥도 혼자 먹을 수 없고 옷도 혼자 입을 수 없는 아빠를 챙겨서 '주간보호소'에 버스를 태워 데려다 주고 올 때면 그렇게 목이 탔다. 엄마 몰래 김치냉장고에 숨겨놨던 하이네캔을 한캔을 꺼내서 시원하게 원샷을 했다.
그렇게 몇년이 지나고 아버지는 요양원으로, 그리고 중환자실로, 그리고 우리 곁을 완전히 떠나갔다.
김치냉장고의 의미
그랬던 김치냉장고가 모터가 정지했다는 소리를 듣다니 시간이 참으로 많이 지났구나 싶었다. 결혼 전에 사위감에게 엄마가 해준 김치찜도 그 김치냉장고에서 꺼낸 김치였었는데,,
나에게 김치냉장고는 그냥 가전제품은 아니었다. 내가 기억하는 마지막으로 대화가 가능하던 시절의 아빠의 우리 가족에게 해준 마지막 선물이었다. 내 이름으로 당첨된 것이지만 아빠가 수많은 사람 사이에서 내 아버지라고 외치고 증명하며 얻어낸 선물. 자아가 붕괴되는 상황 속에서도 아마도 아빠에게 작은 성취의 기쁨을 주었을 그것.
신기하게도 고장 한 번 나지 않고 아무리 오래 보관해도 묵은지 되더라도 못먹게 되지는 않던 김치냉장고.
한번씩 가족들이 이야기 꺼내도 웃으며 떠올릴 수 있는 즐거운 행운이었던 그 김치냉장고. 우리 가족의 역사와 함께 해줘서 고맙다.
부디 안녕히.
이렇게 또 하나가 추억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나는 아빠가 참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