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화까지 'Chapter1. 일잘러의 세상이 흔들렸다' 였습니다.
## 여기서부터는 'Chapter2. 우물안 일잘러를 구원할 메타인지' 로, 핏을 맞지 않는 일터로 넘어가기 위해 2020년에 어떤 노력을 했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신입을 뽑는데 왜 경력을 바라나요?”
내가 서비스기획 입문 강의에서 만난 취준생들은 종종 이런 하소연을 했었다. 요즘 즉시 전력이 될 사람을 뽑는 기업들은 대부분 아예 신입을 뽑기 보다는 1-2년차를 선호하거나 신입이라고 써놓고 ‘ㅇㅇ를 해본 경험이 있는자’와 같은 우대조건으로 암묵적인 중고신입을 뽑으려고 한다. 기업 입장에서는 누구를 가르칠 시간이 없기에 최소한의 역량을 가지고 있기를 바란다. 이런 하소연을 들을 때면, 제 3자인 나는 취준생들을 달래면서 이렇게 말해주곤 했다. 기업은 역량을 검증하고 싶은 거지 경력이 없으면 뽑지 않겠다는 뜻이 아니니 1-2년차를 바라는 모집공고에도 다 지원을 해보라고. 그리고 잘 모르겠으면 회사에 다니고 있는 사람들에게 많이 물어봐보라고도 했다.
‘경력의 핏(fit)이 맞지 않아서 안뽑는다는데, 핏을 어디가서 맞추나요?’
내 일이 되었을 때, 솟아나는 질문은 결국 같은 질문이었다.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제 3자의 관점을 가지고 나 스스로에게도 같은 말을 해주었다.
“일하는 방식이 달라서 핏이 맞는 경험을 가진 사람을 뽑는다고 이야기를 하겠지만, 그 핏이 무엇인지 어렴풋하게 알고 맞추려는 의지를 보여주고, 부족한 핏을 보강해줄 더 큰 강점을 보여준다면 새로운 기회가 올 거에요”
미션은 단순해졌다.
첫째, 내가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 그리고 두번째는 내가 어딜가면 내가 하고자 하는 변화된 방식으로 일할 기회를 얻을 수 있을지 알아내는 것.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했다.
쉽게 말하면 내 직무의 다양성에 대해서 ‘메타인지’를 갖는 것이었다.
“아우! 내가 메타인지가 있었으면, 벌써 넘어가겠지!”
메타인지가 필요하다고 느낀 순간, 도리어 불쑥 불쑥 이성을 비집고 올라오는 답답함. 사실,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 모든 초심자들의 고통이다. 우물안에서 날아다녔던 나지만 우물을 벗어나려고 하니까, 난 갑자기 초심자가 되는 기분이었다.
내가 처음 일을 배울 때 어떻게 했더라? 역시나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방법은 물어보는 것이었다.
질문1 : 내가 하던 것과 어떻게 다르게 일해요?
질문2 : 그곳에 가면 그렇게 다르게 일할 수 있어요?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야 했고, 후보지가 될 만한 곳들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했던 조언처럼.
메타인지 전략, 그 회사의 사람을 만나보기
내가 목표한 키워드는 단 하나. ‘크로스펑셔널 팀’.
기존의 기업들과 다르게 일하는 것으로 가장 유명한 회사 몇 군데를 찾아서 이 질문을 해보기로 결심했다. 한 회사는 사내의 탤런트 애퀴지션(talent acquisition. 사내 헤드헌트부서의 일종) 부서의 리쿠르터를 만났고, 또 다른 회사는 기업에서 일하고 있는 나와 같은 직무의 사람을 찾았다. 그리고 그들에게 난 이직에 대해 묻지 않았다. 내가 선택한 방법은 가벼운 커피챗이었다.
커피챗이란 IT업계에서 많이 사용하는 용어로 커피를 마시면서 수다를 떠는 가벼운 만남을 이야기한다. 커피챗은 사전면접처럼 작용한다는 부담감을 느끼는 사람이 많지만, 사실은 그저 서로 ‘간을 보는 자리’이기 때문에 커피챗 후에 꼭 입사를 지원을 해야할 필요는 없다. 지금 당장 지원해봤자 떨어질 것이 뻔했기에, 정말 가벼운 마음으로 대화해보면서 무엇을 준비할 지 큰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먼저 유명 이커머스의 리쿠르터 2명을 만났는데, 마침 한블럭 옆 건물이었기에 점심시간을 쪼개서 인근 커피숍에서 만남을 가졌다.
‘PO가 크로스펑셔널 팀으로 일하나요? 조직구성은 어떻게 되나요?’
‘그 회사에 계신 분이 쓰신 글에서 본 일하는 방식이 사내에서 표준적으로 일하는 방식인가요?’
‘PO는 서비스기획자보다 의사결정 권한이 많다고 하는데, 의사결정을 하고나서 책임을 지는 방식은 어떻게 진행되나요?’
‘저처럼 서비스기획자로 대기업에서 일하다가 넘어온 사람들 중에 적응을 실패하거나 그런 사람이 있나요? 실패한 사람은 어떤 점을 힘들어 했나요?’
짧은 30분동안의 대화에서 막연하게 품고 있던 질문들을 했고, 그 안에서 나는 몇가지 키워드를 찾아내려했다. 그래서 ‘크로스펑셔널팀’이 가져야 하는 생각이나, 그런 팀에서 일하는 기획자가 갖춰야할 차이점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만한 질문들을 했다.
일하는 방식이 다른 곳으로 넘어간다는 것은 사실 프로세스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일하는 방식이 다를 때는 분명 그것을 뒷받침하는 이론이나 배경이 있을 테니 그것을 알고 싶었다. 이 회사는 아마존의 방식을 따라가기로 유명한 회사였기에 몇 가지 키워드만 제대로 파악한다면 아마존 자료를 뒤져가며 일하는 방식에 대해서 더 이해하기 쉽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질문을 했다. 어차피 당장 지원하지 않을 마음이었기 때문에 질문하면서 부담은 없었다. 하지만 종종 대화하는 중간중간 올라오는 불필요한 감정들을 지긋이 눌러야 했다.
‘내가 더 먼저 저 회사에서 일을 시작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쭈굴함에
‘굉장히 좋아보이는 이야기만 하네, 저 말을 믿을 수 있는건가’ 하는 의심까지.
우물 안에서 자라난 못된 에고가 불쑥 못난 열등감의 모습으로 피어났다.
자리를 마치고 음식에 묻은 흙을 털어내듯 내 감정을 털어내고, 몇 가지 키워드들만 집어들었다.
‘PRD’, ‘플래닝’, ‘스프린트’, ‘메트릭’ ‘애자일’ ‘프로덕트오너’ ‘스크럼’
이미 어렴풋이 알고 있던 단어도 있고, 구체적으로 뭘 이야기하는지 모르겠는 단어들도 있었다. 중요한 것은 지금껏 스치듯 알고만 있던 그 단어를 진짜로 사용하고 있는 기업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불현듯 과연 내가 적응할 수 있을까에 대한 걱정이 들었지만, 아직 나의 안전지대에 있었기에 걱정은 조금 붙잡아 두었다.
다음으로 만난 회사는 독특한 문화와 O2O플랫폼으로 유명한 회사.
이번에는 HR 소속이 아니라 실무자를 만났다. 페이스북에서만 알고 있던 그 기업에서 일하는 분에게 먼저 메시지를 보내서 사무실이 가까운 것을 핑계로 무턱대고 티타임을 요청했다.
‘보통 서비스 기획자로 일할 때랑 어떤 점이 크게 달랐어요?’
‘프로젝트 진행할 때 어떤 점들을 주로 작업하게 돼요?’
‘지금 일하시는 문화는 크로스펑셔널팀이라고 볼 수 있나요?’
이미 하나의 기업에서 몇 가지 어휘를 들었기에 이번에는 좀 더 질문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할 수 있었다. 업무 프로세스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는지 물어보며 처음 이야기했던 기업과 지금 다니던 회사와 3가지를 통해 차이점을 비교했다.
그런 질문들을 하면서 어휘가 달라도 두 기업 사이에 일맥상통한 부분도 있었고, 완전히 다른 부분도 있었다. 오히려 그 당시 다니던 기업과 비슷한 점도 존재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몇 개의 회사의 사람들을 메신저로, 그리고 온라인 커피챗으로 가볍게 만나서 회사들의 일하는 방식들을 물었다. 연차 때문에 오는 가벼운 이직제안들의 경우에도 아직 이직 의사가 없다고 말하며 일단 다 만나봤다. 그리고 내가 선택할만한 이해도를 얻기 위해서 키워드를 얻기 위해서 노력했다.
‘크로스펑셔널 팀’이 어떻게 일하는지 아직은 정확히 몰라도, 어쩌면 알 것도 같은 머리 속에 나만의 지도가 생기기 시작했다. 아마도 우물밖의 모습을 조금은 구체적으로 찐하게 상상하기 시작했던 시기였다.
핏이 어떻게 다른건지 알아야 핏을 맞출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더 또렷해졌다.
헤드헌터를 만나지 않은 이유
많은 사람들은 항상 성장을 지향한다. ‘우물안 일잘러’들도 언제나 성장을 바란다. 그리고 더 이상 그 회사에서 성장하기 어려운 상황이 됐을 때 기가 막히게 그걸 감지한다. 그리고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어쩌면 이력서의 작성이나 헤드헌터를 만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헤드헌터를 전혀 만나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들은 내가 겪는 진짜 문제를 해결해줄 수 없기 때문이었다. 내가 바라는 것은 다른 방식으로 일하는 것이었지만 어떻게 알고 보내는지 모를 헤드헌터들의 마구잡이식 제안문서에는 나에 대한 이해도 없었고, 내가 하고자 하는 업무의 방향은 알 턱이 없었다. 이 업계는 직무에 대한 명칭이 아직 잘 정제가 되지 않아서 과거에 UX기획자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는데, 직무에 대한 이해도가 없으니 뜬금없이 디자이너 자리에 대한 이직의사를 물어오는 경우도 있었다.
이 직무를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 나조차도 혼동하는 일하는 방식의 차이에 대해서 알 수 있을까? 헤드헌터가 무작위로 보낸 콜드메일에서 이직처의 직무에 관심있으면 써서 보내라는 문서는 너무나 단조로웠다. 진행했던 프로젝트명들의 리스트와 자기소개서 몇 줄, 그리고 현재의 연봉과 희망연봉이 나를 대변해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특히나 지금처럼 우물밖으로 나가야 하는 상황이라면, 그런 문서로 ‘핏이 맞다’고 평가해줄 헤드헌터는 없다고 생각했다. 만약 헤드헌터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면 내 결말은 기존에 이직한 동료들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연봉이 조금 더 높지만 어차피 같은 우물인 비슷한 회사로 가는 것 말이다. 난 성장하고 싶지 같은 역량을 소모하고 싶지 않았다. (아, 물론 거절하기에 너무 큰 금액이라면 가야지… 하지만 내 변화와 성장이 없다면 사실상 장기적으로 연봉은 거기서 거기일 수밖에 없다.)
헤드헌터와 상의하지 않은 이유는 또 하나 있었다. 아직까지도 남은 일말의 희망이었던 이 우물안의 한계를 직접 넓혀보는 방법에 대한 기대가 있었던 탓이다. 이직은 마지막 카드이고 싶었다. 성장하지 않고 모두가 떠나가는 상황에서 ‘침몰하는 배에 타고 있는 기분’을 겪어본 적이 있다. 하지만 사람이 나간 자리에는 누군가가 들어오며 배는 그래도 침몰되진 않았다. 내가 회사를 옮기지 않고도 하는 일을 확장하고 내가 더 성장할 수 있다면, 한 회사에서 오랜기간 있으면서 얻은 ‘일잘러’의 당당함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 알량한 생각도 조금은 남아있었다. 이 남은 희망을 ‘나를 이직시켜야만 돈을 벌 수 있는’ 헤드헌터에게 기대할 수는 없었다.
메타인지 기르기- 내가 모르는 것을 서칭하기
몇몇 회사와의 커피챗에서 들은 키워드들을 가지고 책상 앞에 한참을 앉아있었다. 일단 몇가지 산출물 문서의 이름들을 들었고, 팀의 구성원들은 주로 어떻게 조합되는지 들었다. 그 때부터 나의 우물밖 메타인지를 위한 진정한 서칭(searching)은 시작되었다.
고등학교 때 교내에서는 ‘정보검색대회’라는 게 있었다. 여러가지 질문을 주고 주어진 시간내에 인터넷에서 검색해서 올바른 답을 찾아내는 대회였다. 정확한 검색 수준과 판단력이 필요하다. 근거도 명확해야 답을 인정해줬었다. 이제 어느새 20년 전의 이야기지만, 나는 그 교내 대회에서 1등을 했다. 심지어 그 질문지 자체의 원본까지도 플러스로 찾았었다. 그 정보가 나올 수 있을만한 맥락을 찾고 앞서 찾아낸 몇가지를 조합하여 연결되는 자료를 찾는 것은 이 때부터 나에게 주특기가 되었다. 역시나 그 방법을 계속해서 반복했다.
(어쩌면 AI 시대에도 유용한 디지털 리터러시를 키우는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논외로 이야기하면 내가 원하는 정보가 특정 회사의 어드민 형태라면, 그걸 사용하는 유저들이 서로 가이드를 올리는 카페를 뒤져서 알아내는 식의 꼼수도 이 때 다 익혔고, <대한민국 이커머스의 역사>를 쓰기 위한 뉴스 사료 수집도 이때부터 싹을 틔웠다)
내가 커피챗으로 들은 키워드들도 그렇게 서칭의 시간을 가지면서 메타인지를 넓히려고 했다.
어떤 새로운 것을 알려고 할 때 가장 수준 낮은 검색은 ‘단어로 검색’하는 것이다.
“크로스 펑셔널 팀’ 이라는 단어로 구글에서 검색하면 나오는 결과는 굉장히 단순하다. 나는 크로스펑셔널팀으로 일하는 방법이 알고 싶은데, 검색 결과는 단어의 정의만 알려주기 때문이다. 커피챗을 통해서 알아온 몇 가지 키워드들을 바탕으로 질문을 넓혀 나가야 내가 모르는 것이 무언인지가 조금씩 알 수 있게 된다. 시간은 넉넉하게 잡는 것이 좋고, 계속해서 머리 속에 흘러가는 생각들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
먼저 내가 궁금해하는 것을 단어가 아닌 문장형태로 구글 검색을 한다. 단순하게 “how cross functional team work together”와 같이만 검색을 해도 아티클이 여러 개가 쏟아져 나온다. 거기서 나온 아티클을 대여섯개를 골라서 읽고 나면 거기서 뭔가 또 새로운 개념을 찾을 수 있다. 그럼 그 단어를 적어놓고 또 확장하면서 검색을 해나간다.
난 커피챗에서 듣고 왔던, 단어들을 활용해서 또 넓혀나갔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더 정확한 아티클들이 걸려나왔다. 크로스펑셔널팀의 기획자를 지칭하는 호칭인 ‘프로덕트 오너’를 함께 검색하니까 ‘product Management’s role in a modern cross-functional team’ 이라는 아티클이 나오고 거기에서 일하는 방식이나 장단점 등 새로운 정보를 얻게 됐다. 그 아티클에서 본 PRD(product requirement document)라는 단어를 추가로 서칭하고, 내가 일하던 ‘화면설계서’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PRD와 화면설계서가 다른 점’을 검색한다. 이런 식으로 여러 아티클을 보는 사이에 다양한 정보들이 쌓이게 된다.
어느 정도 서칭을 하고 나면 여러가지 키워드간의 관계를 얼기설기 엮어서 정보의 얼개를 만들 수 있게 된다. 앞으로 서칭해나가야 하는 목록이라고 할까. 서칭은 여기서 끝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시작점이 되어야 한다. 그 목록이 앞으로 하나씩 구체적으로 공부해야하는 내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계속해서 탐구해나갈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느 정도 검색을 마쳤을 때, 나는 내가 알아야 하는 것들을 알 수 있었다. 드디어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냈다. 그리고 내가 자주 사용하는 ‘원노트’에 이런 문구를 남겨두었다.
“우물 엑시트 전략이 필요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