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우물안 일잘러를 아시나요 (8)
인생을 바꾸고 싶다면 환경을 바꾸라는 말이 있다. 숱한 고민과 생각끝에 결국 계속 ‘우물 안 개구리’처럼 익숙한 환경에서 뽐내며 있던 나 자신을 더 성장하기 위해서 다르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을 선택하기로 마음 먹고 나니 새로운 고민들이 생겨났다.
이미 여러 회사들과 대화를 통해서 내가 경험해보고 싶은 일하는 형태와 그를 위해서 내가 배워야 할 것들에 대해서 조금은 짐작하게 되었지만, 내가 가고 싶은 회사를 선택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그 어떤 회사도 완벽하게 내가 바라는 모습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조금씩 달랐고, 경험해보지 않고 듣는 것만으로는 실제 모습을 상상하기가 어려웠다.
이직 자체가 목표가 아니라고 해도, 그래도 더 늦기 전에 우물 밖을 나갈 수 있는 환경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구체적으로 나 자신과 대화를 해보기 시작했다.
먼저, 그간 서칭하면서 나에게 해주고 싶었던 말을 해주었다.
“미준아, 잘 나가고 좋은 회사라고 해도 같은 우물일 수 있어.”
기업들을 조사하고, 이직을 통해 여기저기 나아간 동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한 가지 깨달은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유명 IT기업으로 간 동료는 복지가 좋아지고 연봉이 좋아지고 다 좋아졌지만 일하는 방식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바꾸고 싶어하는 것은 일하는 방식인데 이 선택이 원하는 것과 맞는지를 꼭 챙겨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구체적으로 피해야하는 기준들을 정리해볼 수 있었다. 내가 미션으로 가지고 있던 키워드들인 ‘프로덕트팀’ ,‘애자일방법론’,’데이터 근거로 기획하기’, ‘스프린트’, ‘PRD(아니라면 최소 아마존의 6페이저)’와 같은 단어들이 명확하게 아티클에서 보던 것처럼 쓰이는 환경이 될 수 있는 곳들을 생각해보았다.
잡플래닛과 페이스북, 링크드인, 리멤버, 원티드 등 기업명들을 슬슬 쓸어내리면서 나에게 중요한 질문들을 하나씩 해보았다. 내가 선택한다고 해도 그들이 받아줄 보장은 없지만, 나에게는 목표가 있었기에 조건을 정리하는 것이 필요했다.
"미준아, 넌 아예 새로운 환경에서 아예 초짜처럼 시작해도 괜찮니?”
“아니, 난 초심을 찾고 싶긴해도, 초짜가 되고 싶진 않아.”
너무나 중요한 질문이었다. 새롭게 일을 배운다는 것이 기존의 모든 도메인 지식이나 노하우를 포기하고 넘어간다면 선택의 폭은 굉장히 넓어질 수 있었다. 나는 긴 시간을 종합몰 형태의 복잡한 기능이 유난히 많은 이커머스(‘엄청 잘 만들어진’이라고 말하진 않겠다)에서 일했고, 굉장히 오랜기간 대규모 인원이 얽힌 조직에서 복잡하게 일해왔다. 거기서 얻은 이커머스에 대한 사용자들의 보편적인 서비스에 대한 상식이라고 생각하는 인식이나 태도(이 바닥에서는 ‘멘탈모델’이라고 한다)나 운영하면서 나올 수밖에 없는 각종 기능적 요구사항들, 생각지도 못한 오류를 만들어내는 이유를 알게된 프로젝트 경험들. 이런 것들은 하루 아침에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 포기하기엔 너무 아깝고 애정이 있었다. 게다가 일하는 방식을 바꾸는데 도메인지식까지 바뀌게 되는 것은 그야말로 완벽한 초짜가 되는 길이었기에 선택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내 선택지에 대해서 두번째 조건이 생겼다. 내가 잘 아는 ‘이커머스’에 대한 도메인 지식을 활용할 수 있는 회사여야 한다는 것. 다르게 말하면 내가 10년 가까이 쌓아온 이커머스 지식을 필요로 하는 곳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예 새롭게 만들어지는 이커머스가 좋을까? 아니면 기존처럼 어느 정도 안정이 된 이커머스가 좋을까?”
“흠.. 나는 복잡도가 있는 상태의 이커머스를 더 잘 알고 구축프로젝트도 해봤었으니, 초기에 단순하게 만들었다가 점점 복잡도가 높아져야 하는 이커머스가 있다면 좋을 것 같아. 아예 새로 시작하는 이커머스라면 단순하게 MVP로 빠르게 기능만 만들어야 하는데 그러기엔 내가 복잡한 케이스를 스킵하는 것이 처음에 쉽지 않을 것 같아.”
더 구체적으로 스스로에게 물었다. 내 일에 있어서 내가 잘하는 것은 무엇인고, 그것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 회사에서 내가 더 필요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에 대해서 물었다. 내가 현재 기준에서 일하는 방식을 제외하고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상태를 이야기할 수 있었다.
“아, 이런 것도 있어!. 이커머스를 10년 다니면서, 사용자 연령대가 같이 높아지는 현상을 겪었었잖아? 이번에는 최소 20대를 타겟으로 한 곳이면 좋겠어.”
생각이 이어지자 다른 조건도 생각해볼 수 있었다. 두루뭉수리하던 나의 선택의 기준들이 조금씩 윤곽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들을 정리해가다보니 몇가지 회사들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모든 기업들을 미리 다 조사할 수는 없었기에 조건에 부합하는 기업에 다니는 사람들에게 의도적으로 이직을 고려하고 있다는 것을 티를 내고, 그 회사에서 일하는 방식을 물어보기도 했다. 하루 아침에 이 질문들이 다 정리되지는 않았다.
이렇게 3가지 조건이 정해졌다.
1. 일하는 방식을 바꿀 수 있는 곳(크로스펑셔널한 프로덕트팀을 지향하는 곳)
2. 이커머스면서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는 복잡도를 높이는 도메인 지식을 활용할 수 있는 곳(활용되기를 원하는 회사) : 아직은 복잡도가 낮으나 성장하면서 복잡도가 높아질 수 있는 곳
3. 가능하면 서비스 사용자 연령층이 낮은 곳
이 기준들을 가지고 고민하면서 내가 지원할 수 있는 회사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물론 그 회사가 날 뽑아준다는 확신은 어디에도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1번 조건에 맞게 노력해오고 관심을 갖고 공부한 흔적이 있고, 2번의 조건을 바라는 곳이라면 내가 서로 니즈가 일치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2번의 조건을 선택하는 순간 물론 가장 1위를 달리는 빅테크 기업 몇개가 후보지에서 날아간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이 시점의 선택에서 이 지점에서 남편과의 상의도 많이 했었다. 빅테크 기업이 날 뽑아주지도 않을 수 있는데 지원부터 안한다는 것이 유부녀 30대 중반의 직장인에게는 리스크일 수 있으니까. 하지만 이미 1번에서 날아간 안정적인 기업은 훨씬 더 많았기에 수익 개선을 위한 이직이라면 어차피 세우지도 않았을 조건들이었다.
그래서 현실적인 인생을 위해서 추가적인 조건을 넣었다.
최소 이익을 만들어낼 수 있는 안정적인 트래픽을 보유한 곳일 것
최소 연봉을 깎아서 가지는 않을 것
이상적인 조건들에서 현실에 땅을 붙이게 된 셈이었다.
회사 선택은 미니마이저로
이런 조건들이 있으면서 몇몇개의 회사가 추려지고, 몇몇 곳과 가볍게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8월 중순쯤 나는 내 다음 행선지를 결정할 수 있었다. 6월에 책이 출간되고 나온 리뷰를 본 뒤, 2달여만에 나는 우물밖을 빠져나와 새로운 곳으로 갈 곳을 정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가장 유용했던 것은 ‘내가 정해놓은 조건들’이었다.
모든 선택의 방식에는 2가지 방법이 있다. 맥시마이저가 되어 최대한 많은 조건들에 가장 많이 해당하는 곳을 찾기 위해서 최대한 모든 기업을 조사하는 방법이 있고, 서칭과정에서 미니마이저가 되어 내가 부합하는 조건에 맞는 기업을 찾았다면 빠르게 선택하는 것이 있다. 일부 부족하거나 불안해보이는 면이 있다고 해도 미니마이저의 선택은 명쾌하다. 난 이럴 때, 미니마이저로 선택한다.
가끔 이직을 이야기하는 사람들 중에서 “어딜가면 미래가 밝을까요?”라거나 “어딜가면 더 일하기 좋을까요?”와 같은 두루뭉수리한 조건으로 이직처를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맥시마이저의 선택은 험난하다.
‘미래’라는 단어에서 회사의 미래부터 나의 승진이나 성과에 대한 미래, 알수도 없는 일하는 방식에서의 적응 실패 가능성 등 고민할 조건이 더 많을 것이고, 연봉이나 성과금, 휴일 등등 모든 것을 가장 만족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물론 더 최악은 ‘어딜가면 더 일하기 좋을까요?’다. 이런 경우 회사의 업종이나 도메인부터 바꾸는 바꾸니 자신의 강점을 드러낸 방법을 찾기도 어려워진다. 나와 같은 성장과 변화에 대한 꿈이 있다면, 이런 질문들로는 더 많은 선택지에 파묻혀 쉽사리 결정하기 어려웠을 것 같다.
조건을 미리 생각했기에 나름 더 수월했다. 그리고 이 조건들을 생각해둔 것이 면접에서도 의미있는 답변을 할 수 있었다. 기업의 리더들도 상대방이 이 회사를 왜 오고 싶어하는지 궁금해할텐데 나는 이 조건들에 대한 나의 생각들이 대부분 그 질문에 답이 될 수 있었다.
지금의 나라면, 한 가지 더 물을테다.
그렇게 우물을 탈출할 준비를 모두 끝낼 수 있었다. 지금 꼭 채워 만 3년이 더 지났다. ‘지금의 나’라면, 한가지 조건을 더 생각했으면 좋았겠다 싶은 것도 있다.
“네가 원하는 일하는 방식이 잘 정착된 회사가 좋을까, 아니면 일하는 방식을 함께 만들어가는 회사가 좋을까?”
당시에 나는 생각지 못했던 질문이었다. 그리고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후자의 회사를 온 것이 잘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일하는 방식이 이미 잘 정착된 회사라면 가서 그대로 배우면 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오히려 그 미묘한 차이를 비교하며 왜 이렇게 다른가에 대해서 생각할 시간이 없었을 수 있었을 것 같다. 나는 방향성에 대해서는 일치했지만 일하는 방식을 계속해서 변화시킬 수 있는 상황의 회사에 왔고, 그 변화의 과정속에서 내가 궁극적으로 해보고 싶었던 일하는 방식을 계속해서 적용해보고 실패하고 수정하고 해볼 수 있었다. 자유도가 있었기에 일하는 방법을 넓히고 싶다는 내 조건에서 정말 완벽한 조건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나는 발에 기를 모았다. 이제 점프할 일만 남아있었다.
하지만 우물안 일잘러가 정말 일잘러가 되기 위해서는 1번의 큰 점프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었다. 우물벽을 기어오르기 위해서 우물벽을 한참을 점프하며 올라가야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10년간 지켜온 우물안 일잘러의 에고가 자꾸 튀어올라와 내가 우물을 벗어나 바다로 이어가는 것을 방해했다.
챕터2. 우물안 일잘러를 구원할 메타인지. 끝.
다음주부터는 달라진 환경에서 적응하면서 겪는 고민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다루는,
챕터3. 우물밖으로 뛰어나간 일잘러. 가 이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