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8시부터 비가 온다고 호우주의보에 재난문자가 계속 와서 단단히 겁을 먹고 있었는데, 우습게도 실제 비는 하나도 내리지 않고 있다. 창문 너머 저 아래에 간간히 우산을 쓰고가는 사람이 있음에도 예상했던 물폭탄은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일기예보가 지나치가 과도하게 예측했던 것.
삶도 때론 그렇다. 때로는 실제 일어난 일보다 본인이 체감하는 고통이 더 크게 나타난다.
내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행운과 이미 충분히 훌륭한 상황들이 눈앞에 있음에도 약간의 피로를 대단하게 느끼는 시절이 있듯이.
되돌아서 생각해보면 2010년 취업을 준비하던 시절의 나는 얼마나 치열했었나. 알츠하이머를 걸린 아버지와 크지 않은 월급으로 생계를 꾸리는 엄마를 위해서 자존심보다도 중요한건 생존이었다. 그 회사조차 결국 입사하지 못했다면 나는 더 많은 실패속에서 아마도 아무 직무나 취업을 하려고 했을 것 같다. 그리고 아마도 그 직업이 지금 직업과 다르다고 해도 열심히 하고 있을 거다. 왜냐면 나에게는 정말 생존의 문제가 있었으니까.
그저 즐겁게 놀고나서 머리를 침대에 누이는 것만으로도 아픈 가족을 가진 사람의 눈물이 핑도는 죄책감의 감정은 정말 겪어보지 않고서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런 내가 책도 쓰고, 나름 회사 밖에서의 나를 키우고, 일에서의 연차를 높이고.. 그리고 이 세상에 이렇게 귀여운 존재를 없을 것 같은 아기곰같은 아들과 시간을 보내고 나서 피로하다고 말하는 것은 어찌보면 정말 올챙이 시절을 까먹은 감정적 사치에 가깝다.
다른 사람의 노력과 발전을 부러워할 시간에 한가지를 더 생각하고, 내가 여유가 없어서 무언가 하지 못하는 일이라고 해도 그 시간이 아이라는 존재와 함께 채워져있음에 감사해야하는데 그걸 하지 못했다.
판교로의 주 3일 출근을 시작한지 이제 2달이 좀 넘었는데, 왕복 3시간을 이렇게 허투루 쓰는 내 낯선 모습에 육아를 핑계대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낮이고 밤이고 조금은 육아를 핑계대고 뇌와 눈, 귀까지 괴롭히는 숏츠 따위는 왜케 보고 내가 중요시하는 액션을 왜 더 많이 하지 못하는지..
역시나 명제는 영원한 명제인지 모른다.
"바쁜 중에 해내지 못하면, 한가한 중에는 절대 할 수 없다"
나는 지금 바쁜척 하며 스스로에게 너무너무 지치고 피곤하니까 그런거라고 면죄부를 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비록 14년전으로 젊은 나였지만 그 당시의 간절함의 정도가 달랐던 나 자신을 떠올린다면, 매너리즘에 빠져서는 안된다.
생각해보면 난 지금도 굉장히 중요한 일, 행복한 일, 필요한 일들로 하루가 꽉 채워져있다.
아기 덕분에 30대의 후반에 엄마로서의 나, 와이프로서의 나, 딸로서의 나, 며느리로서의 나의 모습도 훨씬 더 진지하게 나에게 다가왔다. 좋은 사람들이 얼마든지 주변에 있고, 나의 이야기를 동조하는 사람들도 함께 있다. 심지어 업무적으로도 계속 성장할 기회가 주어지고 있다는 것도 행운이다.
이보다 큰 행운은 없다. 멈춰서서 부러워하기 보다는, 시간은 언제나 내편이니까 또 새롭게 항해를 해나가자.
20대에 알츠하이머 아버지를 돌보는 대학교 4년 장학생.
내 일을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직장생활과 컨텐츠 생성을 놓지 않는 사람.
하는 일을 꾸준히 해나가면서 아이도 사랑으로 키우는 워킹맘.
나보다 이걸 잘 아는 사람이 또 있을까?
책임감은 어쩌면 발전의 행운이다. 이만한 성장 스토리의 서사는 없다.
그니까 지금의 행운 중 당연한 것은 없어야한다. 매일매일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