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의료보험증

어른이 된다는 것

by 도그냥

미운우리새끼 재방송을 보다가 유희열의 이야기를 들었다. 어머니가 뇌종양은 노화의 여러 발현중 하나라고 건조하게 말하는 의사의 이야기를 듣고 유희열은 부모님이라는 큰 울타리가 처음으로 부너지는 경험을 했다고 한다.


지금 내 나이 서른두살. 이미 10년전즈음 나는 그걸 깨달을 기회가 일찍 찾아왔었다. 어쩌다 어른의 마음을 가지게 됐을까를 기억해보면, 난 종이 의료보험증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감기라도 걸려 소아과에 갈 때면 엄마는 날 챙기고 파란 껍데기의 의료보험증을 한 손에 꼭 쥐고 갔다. 그게 어떤 용도인지 이해하지 못했던 나였지만 병원 대기실에 앉으면 언제나 의료보험증을 들여다보곤 했다. 든든한 부모님의 이름아래 나란히 적힌 나와 언니의 이름을 보면 무언가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한쪽면에 간호사가 휘갈겨 쓴 병원 기록을 보고 있으면 그 어떤 아픔이 찾아와도 항상 엄마아빠에게 보호받을 수 있다는 느낌을 가졌던 것 같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의료보험증'은 '건강보험증'이 되었고 더이상 볼 일이 많이 없어졌다. 병원에서는 주민번호만 남기면 종이 증서가 없어도 되도록 시스템화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건강보험증을 다시 만나게 된 것은 스물두살 겨울이었다. 든든했던 아버지의 알츠하이머 증세가 점점 심해졌고 엄마의 고민도 함께 깊어질 때쯤 나는 휴학을 택했다. 가족과 나, 모두를 위한 선택이었다.

나는 외국계 회사에 계약직 직원으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고 월급 92만원중 50만원을 매달 집에 보탰다. 그리고 남은 돈으로 내 용돈과 동시에 취업과 졸업에 필요한 공부들을 해나갔다.

처음 입사하고 이것저것 배우기 바쁠 때쯤 내 이름앞으로 한장의 우편이 날아왔다. 바로 그 '건강보험증'이었다.

접히지도 않은 빳빳한 인쇄용지의 건강보험증을 받고 어린시절 습관처럼 속을 살폈다. 그리고 내 마음 속에서 아슬아슬하게 남아있던 부모의 울타리는 무너져내렸음을 실감했다.


출처: 네이버 이미지 검색

새로운 보험증에서도 우리 가족은 또 나란히 보험급여자 목록에 함께했다. 다만 가장 마지막줄에 있던 나는 가장 윗줄로 옮겨져 있었다. 가족중 유일하게 4대 보험에 가입되면서 모두가 편입된 거였다.

첫째줄의 무게가 상당했다. 종이를 한참 멍하니 바라보았던 기억이 난다.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과 울타리가 모두 머리속에서 재정비되는 기분이었다.


아마도 아픈 아버지와 엄마가 느낀 어른으로서의 번뇌를 처음으로 마주하고 나눈 시작점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나는 한 순간에 어른의 세계로 들어가고 있었다.




부모님에게서 정신적으로 독립하고 그리고 나만 부모님에게 기대는 것이 아니라 나 역시 부모님에게 하나의 버팀목이자 울타리가 되어주어야한다는 것. 사실 언제나 알면서도 어려운 일이다.

이제는 아프던 아버지는 하늘로 가고 없고, 나는 엄마의 곁을 벗어나 나의 가정을 꾸리고 있다. 그래서 가끔 무척 지치는 날에는 무작정 부모의 울타리로 되돌아가고 싶은 순간이 있다. 그럴 때면 이 종이건강보험증이 생각난다.

건강보험증은 생생하게 상기시켜준다. 이미 스물두살 그 겨울부터 부모의 울타리만 있던 곳에 나의 울타리도 생겨났음을, 그리고 밝은 얼굴로 나의 울타리에 있는 모두를 보호하고 지켜줄 필요가 있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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