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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강민 Salawriter Mar 04. 2019

이름만으로 충분합니다.

직장에서의 님 호칭제를 대하는 마음

나의 이름은


아빠. 여보. 형. 오빠. 선배님. 아버님. 매니저님. 부장님. 연구원님. 박사님. 작가님. 김강민님. 강민아. 강민씨. 저기요. 아저씨. 사장님. 고객님……


오늘 하루, 당신은 얼마나 많은 당신이었나요? 눈 떠서 잠들기까지 나를 부른 목소리들을 떠올려 보니 이름 세 글자, 두 글자, 그리고 또 다른 내가 참 많았던 것 같습니다.


저의 이름은 김강민입니다. 성 김(金), 굳셀 강(剛), 옥돌 민(珉). 뜻은 강하면서 소리에는 따뜻함이 있는, 아버지께서 지어주신 이 이름이 무척 좋습니다. 이름이 지금과 다르다면 어떨까 상상해 본 적이 있어요. 가끔 이름이 잘못 전해져 김광민이라고 불리기만 해도 얼마나 어색한지, “강”에서 입을 크게 벌려 다시 이야기해주곤 하는데 전혀 다른 이름이라니… 이 이름으로 오래 살아와서일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나라는 사람에게 어울리는 이름은 처음부터 김강민 하나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만큼 나와 이름은 떼어놓을 수 없으며, 나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세 글자입니다.


그런데 이런 이름을 두고 지금까지는 다른 나로 더 많이 불려 온 것 같습니다.




호칭(呼稱) : 이름 지어 부름*

*표준 국어대사전


우리가 서로의 이름을 지어 부르는 것을 호칭이라고 합니다. 나를 부르는 사람과의 관계를 표현하거나 나를 다른 사람과 구별하는 의미나 특성을 나타낼 때 이름 세 글자와는 다른 호칭이 쓰이죠.


우리나라의 회사에서 흔히 사용하고 있는 사원부터 부장까지의 호칭은 직무 상의 위치와 서열을 의미하는 직위이며 일본의 연공서열 관행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근속연수대로 급여와 지위가 올라가는 관습이 바탕에 깔려 있는 호칭이다 보니, 혁신을 추구하며 성장해야 하는 회사라는 조직에 이러한 호칭의 수직적이고 경직된 성격이 어울리는지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본부장, 사업부장, 팀장, 파트장과 같은 호칭은 개인의 역할을 나타내는 직책입니다. 크고 작은 조직의 책임자임을 나타내는 만큼 조직의 구성원을 이끌고 보듬어야 하는 역할의 무거움이 “장”이라는 글자에 담겨 있습니다. 직책자와 비 직책자 사이도 인간관계의 한 가지다 보니, 각자의 성격과 성향에 따라 심리적인 거리가 매우 가까울 수도, 한없이 멀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직책자가 가진 인사권이나 평가권 때문에 한없이 편하게 대할 수는 없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장”이라는 글자에는 또 다른 무거움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이런 호칭이 회사 생활의 모든 것을 좌우하지는 않지만 함께 일하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분명하겠습니다.




호칭이 가진 힘, 이름이 가진 힘


호칭제를 바꿔보려는 회사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과거의 직위, 직책 호칭제에서 단계적으로 호칭을 통일하고 점차 생략하는 회사도 있는데요, 우리 회사는 2006년에 매니저로 호칭을 통일했습니다. 이제는 10년이 훌쩍 넘어 자연스럽게 서로를 매니저님이라고 부르지만 상대방의 나이부터 의식하게 되는 동방예의지국에서 호칭을 통일하는 것은 사실 쉽지 않은 시도입니다. 그런데, 매니저라는 호칭도 사용하지 않고 임원까지 대상으로 포함해서 이름과 님만 부르는, 호칭 통일보다 더 어려운 시도를 작년에 하게 되었죠. 이것은 앞서 말한 것과 같이 회사에서의 호칭이 사람 사이의 관계에 작용하는 보이지 않는 힘 때문일 것입니다.


직장 내에서의 직위, 직급, 직책으로 정해진 호칭에는 상사와 부하 직원, 직책자와 비 직책자, 임원과 직원과 같은 구별이 담겨 있습니다. 일이 되게 하기 위해서 유연한 생각과 장벽 없는 의사소통이 중요하다면, 이런 호칭은 우리가 생각하고 목소리를 내는데 제약 조건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직급, 직위, 직책의 호칭 다음에 보고, 승인, 명령이 뒤따른다면 이름의 호칭 다음에는 공유, 토론, 공감, 협력의 언어가 이어지기 쉬운 것처럼 말이죠. 이름에는 그런 힘이 있습니다.




님 호칭제를 대하는 마음


주변에서는 아직 여러 가지 호칭이 들립니다. 매니저가 익숙해진 과정처럼 우리가 서로를 이름으로 부르는 것도 시간이 필요하겠지요. 어쩌면 용기가 필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저 역시, 아직 친분이 두텁지 않은 동료나 어르신처럼 느껴지는 선배님을 이름으로 부르려면 한 박자 쉬게 되니까요.


우리의 관계는 변화하고 있습니다. 수동적인 호칭으로 시작되는 상명하복의 관계가 아닌, 이름을 부르며 가까워지는 마음의 거리, 수평적으로 생각하고 이야기할 수 있는 관계, 모두가 책임감을 가지고 각자의 역할을 하는 마음 가짐으로 바뀌어 가고 있는 이 과정에서 우리는 모두 “님"이 되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우리의 이름에는 우리의 모든 것이 이미 담겨 있습니다.

소중한 이름에 당신의 귀한 마음을 담아 불러준다면, 이름만으로 충분합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김춘수의 “꽃” 중에서




*모 기업의 웹진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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