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과 처음 맛 본 수확의 기쁨
몇 년 전부터 강연이 인기를 끌고 있다. 그중에서도 일반인들이 자신의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는 강연이 눈에 많이 띄는 것이, 강연이라면 의례히 ‘유명인사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예전과는 사뭇 달라진 것 같다.
‘경험‘이라는 자신만이 겪어본 사실에 본인이 깨달은 ‘생각‘을 보태면 다른 사람에게 ‘교훈‘이 될 수 있는, 세상에서 유일한 이야기가 탄생한다. 무대에 올라 자신의 경험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그런 간접 경험이 계기가 되어 또 다른 경험으로 이어지는 기회가 많아진 세상. 말하자면 경험이 큰 자산인 세상이 되었다. 그리고 이런 세상에서 우리의 아이들이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된다면, 그 자산의 가치는 참 클 것 같다. ‘도전과 성공’처럼.
시기는 오래전이지만 특별했던 경험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대학원 졸업 후 입사한 해였는데, 연말쯤에 회사의 전체 공지 메일 하나가 눈에 띄었다.
[도전장을 던져라] 여러분의 도전을 지원합니다!
새해를 맞아 직원들의 도전을 지원하고, 그 과정을 취재하여 사보에 담겠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도전 과제를 ‘가족 농장’으로 정하고 도전 이유와 함께 응모를 했다.
아빠의 유학을 위해 낯선 타국으로 떠나 5년 반이라는 시간 동안 희생한 가족을 위해, 새해에는 가족들의 뜻에 따르는 아빠가 되어보겠습니다. 동물, 식물 키우기를 좋아하는 큰아들은 농장장을, 작은아들은 부농장장을 맡아 아이들이 꿈꾸는 농장을 만들어 보는 기억을 선물하고 싶습니다. 아내는 수확을 관리하고, 저는 만능 일꾼이 되어 일할 계획입니다.
운 좋게도 4개의 과제 중 하나로 뽑히게 되었고, 2월에 출사표를 던지며 도전이 시작되었다.
1년 간 농장 운영비를 회사로부터 지원받고, 미리 정해둔 최종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는 조건이었고, 목표는 ‘직접 수확한 농작물로 10월 말 특별한 식탁 차리기’로 정했다. 밭일이라고는 고구마 캐기 몇 번 한 게 전부인 초보 농부 가족의 농장 도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집에서 차로 30분 정도 거리에 있는 농장의 한 구좌(다섯 평)를 분양받았다. (다섯 평 밖에 안 되는 땅에 심어봐야 뭘 얼마나 심겠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4~5인 가족에게는 차고 넘치는 면적이다.)
4월, 드디어 농사 첫 날을 맞이했다. 첫 일은 밭갈이, 이랑 만들기, 모종 심기, 씨 뿌리기였다. 2~3월 동안 책과 인터넷으로 나름대로 공부는 했지만 무엇을 모르는지조차 모르는 상태였다. 초보들이 농사를 짓는다고 하니 염려되셨는지 장모님께서 도와주러 오신 덕분에 첫날부터 농장장 형제들이 실망하는 사태를 면할 수 있었다.
흙장난에나 관심이 있으면 어떡할까 걱정했던 아이들은 모종 심기와 씨 뿌리기에 정성을 쏟았다. 모종이 무럭무럭 자라기를, 새싹이 땅을 뚫고 잘 올라와 주기를 바라며 듬뿍듬뿍 물 주는 일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오늘 감자, 상추, 파, 부추, 여러 채소를 심었어요. 감자는 싹을 땅 속에 묻었고, 상추랑 파는 작게 자란 싹을 옮겨 심고, 딸기도 심었어요. 이런 건 처음 해보는데, 조금 힘들긴 하지만 정말 신기하고 재미있어요. 오늘 심은 것들이 얼른 자라서 먹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앞으로 정말 열심히 키울 거예요.
– 사보 속 첫째의 인터뷰 中
아이들과 장모님의 활약으로 가족 농장 첫 삽을 성공적으로 뜰 수 있었다.
초보가 하는 일이 생각대로 다 될 리가 없다. 심어 놓은 모종 중에 일부는 시들시들 말라 버리고, 잔뜩 심어 놓은 감자는 싹이 올라오지 않으니 애가 탔다. 다행히 시금치 싹이 쏙쏙 올라오기 시작하더니 감자도 여기저기서 싹이 단단한 땅을 뚫고 나왔다. 그 사이에 모종으로 심어 놓은 채소들은 무성해지기 시작했다.
텃밭이 가득 차기 시작하니 아이들의 손도 바빠진다. 힘을 합쳐 무거운 것도 나르고 물도 더 부지런히 뿌려 준다. 첫째는 어느덧 많이 능숙해져서, 호미로 잡초 뽑기 정도는 이제 놀이 같다.
물론 진짜 놀기도 한다. 첫날부터 시작한 흙장난은 평생 안 해도 될 만큼 원 없이 한 것 같다.
그렇게 가족들이 농장에 익숙해져 가는 만큼 농작물의 수확량도 점점 늘어 갔다. 약을 따로 치지 않으니, 토마토 같은 것은 바로 따서 먹는 재미가 있었다. 쌈 채소는 성장이 너무 왕성해서 한 번 따면 우리 식구가 다 소화를 못 할 정도였다. 왕성한 쌈 채소 덕분에 다른 식구들을 초대해서 같이 따기도 하고, 동네 이 집 저 집에 인심을 썼다.
아이들의 작은 손으로 나르고 날라 뿌려준 물에 보답하는 듯 농작물들은 이런 풍년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풍성한 수확의 기쁨을 안겨주었다.
농작물은 하루가 멀다 하고 쑥쑥 자라니 자주 가지 않으면 못 먹고 버리는 일이 벌어지게 된다. 야근하고 돌아가는 길에 양복바지 양말 안에 쑤셔 넣고, 조명도 없는 캄캄한 밭에서 핸드폰으로 불빛 비춰가며 서리하듯 일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어느 때는 그 반대로 비가 안 오니 물을 주러 일주일에 몇 번을 가야 되었다. 결국 주중에 아내가 따로 들러 물을 줘야 했다. 그래서 흔히 ‘주말 농장‘이라는 용어를 쓰지만, 우리 가족은 ‘가족 농장’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농장을 시작하면서 주말은 당연히 밭일하는 것으로 정해져 버렸으니 아이들이 좋을 리가 없었다. 날이 더워지니 힘도 들고 수확의 기쁨도 점점 익숙해지니 불만의 목소리가 슬슬 들려온다.
우리도 놀이동산 같은 데 가면 좋겠어요.
엄마의 평일이 바빠져도, 아이들이 흙먼지 날리는 밭에서 틈틈이 놀아야 해도 농부는 쉴 수 없다. 회사에서 지친 아빠도 마찬가지다.
그런 고생의 보답과 같이 찾아온 이벤트가 장마를 앞둔 시기의 ‘감자 캐기’였다.
줄기를 잡아당기면 주렁주렁 매달려 올라오는 감자는 또 다른 수확의 재미를 안겨준다. 오랜만에 아이들의 신나는 손놀림에 감자 수확도 성공하고, 쌈 채소와 같은 여름작물의 마지막 수확도 마무리했다.
친구들과 함께 밭에 온 적이 있는데 제가 키우는 것이라고 얘기하고 하나씩 따줬어요. 방울토마토도 함께 따서 나누어 먹고 감자도 캤는데 정말 맛있었어요. 주말마다 엄마, 아빠, 동생과 함께 밭에 오는 게 신나고 즐거워요. 이제 감자가 있었던 자리에 고구마를 심을 거래요. 고구마도 정말 잘 키워서 맛있게 먹을 거예요.
– 사보 속 첫째의 인터뷰 中
가을 작물로 배추, 무, 고구마를 심고 이제 도전의 2라운드가 시작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전이 끝날 거라고 생각하니 벌써 서운한 생각이 들기도 하고, 처음으로 경험한 가족 농장이 어땠는지 돌이켜 보게 되었던 것 같다. 고생한 기억도 많이 남았지만, 아이들이 자연을 직접 체험할 수 있었던 것과 직접 씨를 뿌리고 수확을 하면서 느낀 기쁨, 먹는 것의 귀함을 알게 된 것은 가장 중요한 점으로 꼽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경험을 다른 사람들과도 나눌 수 있었다.
아이들이 그전에도 채소를 잘 먹었는데, 우리 밭에서 따 온 것은 더 맛있게 먹은 것 같아요. 이웃 아이들과도 함께 여러 번 갔었는데, 평소에는 채소를 입에도 안 대던 아이들이 밭에서 직접 따 온 것은 무척 맛있게 먹는다며 놀라워하더라고요. 직접 키워보는 것만 큼 확실한 교육은 없는 것 같아요.
– 사보 속 엄마의 인터뷰 中
일 년 동안 아이들과 함께 키운 농작물은 상추, 깻잎 등의 잎채소와 시금치, 파, 가지, 무, 당근, 고추, 토마토, 호박, 감자, 고구마 등으로 종류도 다양했다. 가을에 앞서 심었던 작물들도 잘 자라주었고, 감자에 이은 고구마 캐기 이벤트도 또 한 번의 재미를 선사해 주었다.
도전을 마무리하면서, 마지막까지 정성 들여 기른 수확물로 소박한 요리를 만들 수 있었다. 잘 익은 무에 빨갛게 익은 고추를 갈아 넣고 당근과 배 등을 썰어 넣어 시원하고 칼칼한 나박김치가 완성되었다. 가을에 수확한 고구마는 고소하고 달콤한 고구마튀김으로 만들었다.
몇 년 지나 아이들에게 물어보니, 놀이동산에 못 가도 다시 한번 가족 농장을 하고 싶다고 한다. 나중에 딴 소리를 들을지라도 다시 한번 도전해 봐야겠다.
아! 또 한 가지 수확이 있었는데, 가족 농장에 도전하던 중 선(Son) 셋 중 막내를 얻었고, 다음 해 2월에 태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