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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강민 Salawriter Oct 30. 2017

산정호수, 계획 없이 떠난 가을 여행

아이들과 훌쩍 떠난 단풍 여행

여러 가지로 머리가 복잡했다. 회사 일은 일대로 이래저래 신경 쓸 일이 많은데, 집안은 또 왜 그렇게 다사다난한지. 멀쩡하던 컴퓨터가 오류가 나더니 복구가 안되고, 밤낮없이 잘 돌아가던 자동차 블랙박스는 난데없이 거치대가 망가져 콘솔박스 안에서 휴가를 보내는 중이었다.


회사 일은 즐기는 편이면서도 사무실 문을 나서면 일은 바로 잊고, 일상의 웬만한 문제는 맞닥뜨리더라도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차근차근 해결하는 체질이지만, 요 며칠은 뭘 해도 마음대로 잘 안 되는 그런 시간을 보내왔다.

확실히 이건 내가 추구하는 일상과는 거리가 멀다.




토요일 오전.

마음에 들지 않는 현재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주말 오전을 평소보다 부지런히 보내기로 했다. 서비스 센터 문을 열자마자 들려 컴퓨터 수리를 맡겼다. 가장 걱정이 되었던 컴퓨터의 자료는 전혀 손상이 되지 않았다. 출발이 매우 좋다. 그 기세로 블랙박스도 대충 해결을 했다.


점심시간이 지나 복구된 컴퓨터를 찾았다. 이 정도만 되어도 마음이 놓이면서도 한편으로 무언가 이가 빠진 듯한 느낌이 들었으나, 회사 일을 억지로 잊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라는 것을 인지하고는 더욱 열심히 망각의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일은 월요일부터 생각하자.'


별 것 아닌 문제로 어지러웠던 일상이 제자리를 찾았으니 늘 하던 것은 해야 한다. 컴퓨터는 트렁크에 고이 모신 채, 언젠가부터 주말 행사로 자리 잡은 막내와의 도서관 나들이를 나섰다. 각자 마음에 드는 책을 한 권, 두 권씩 빌려 들고, 다음 코스인 자동차 전시장에 들러 자동차 몇 대를 구경하고, 집에 없는 브로셔도 한 권 손에 쥐었다. 매우 자연스럽다.


여기까지 아주 좋았는데, 또 망각에 실패한 내 머리 속에 일 생각이 떠오른다.


우리 호수 보러 갈까?


어디라도 가고 싶었다. 아니, 가야만 하는 절박함이 속으로 느껴졌다.

집에서 전화를 받은 둘째의 들뜬 목소리가 들려온다. 엄마도 찬성을 한 모양이다.

그렇게 해서 산정호수로 향한 시간, 오후 세 시.




토요일 늦은 오후.

어디론가 향하기에는 애매한 시간. 다들 이른 저녁을 먹으러 가는 도로 위에는 행렬의 시작점이 보이지 않는다. 일상에서 벗어나기는 했으나, 멀어지는 속도는 성에 차지 않는다. 그래도, 포천은 익숙하지만 산정호수는 처음 가보는 곳이니, 그런 곳으로 향하는 설렘만으로도 약간의 불편함을 해소하기에는 충분하다.

또 한 가지 다행인 점. 어젯밤, 아주 오래전에 즐겨 듣던 노래 몇 곡을 핸드폰에 담아 두었고, 여행길의 배경 음악이 되어 주었다. 몇 소절에 마음이 뭉클한다.


여행이 즉흥적이었던 만큼 호수에 대한 별다른 정보도 없었는데, 내비게이션 안내대로 가다 보니 산으로 산으로 올라간다. 이럴 줄 알았으면 기름 좀 넣고 올 걸. 계획이 없어도 너무 없었던 탓에 불안함을 동반하게 되었다. 도착해서 알게 되었지만 호수는 산의 정상 부근에 있다. 그래서 산정호수인가 생각했지만, 실제로 호수의 이름은 산정(山頂)이 아닌 산정(山井)이다.

"명성산이 병풍처럼 둘러있어 산속의 우물과 같은 호수"라는 소개를 보니 이해가 간다.



다섯 시가 조금 안 되는 시간에 도착하니, 해가 서서히 호수의 수면과 가까워진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그런 건 아니지만, 호수를 만끽하기 전에 제일 먼저 눈에 띈 호박엿부터 입에 물고 호수 둘레길을 걷는다. 우리가 향한 곳은 선착장. 호수의 그림 같은 풍경과 함께 눈에 들어온 오리배를 우리도 타보기로 했다. 억새 축제 중인 호수의 둘레길에 준비되어 있는 억새꽃 길은 덤.





오리배는 수동을 선택했다.

사실 우리가 탄 배는 돌고래였지만, 명칭이 무슨 상관. 모터가 달린 자동보다는 다 함께 페달을 밟아 보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다. 확실히 옳은 선택이었다.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풍경이 있으면 모두 힘을 보태야 한다. 가만히 앉아 두리번두리번 구경만 하는 자동 승선자들 보다는, 유별나 보일지 모를 정도로 다리를 움직이고 있는 우리 뱃사람들이 훨씬 생동감이 있다는 우월감도 호사로 누려본다.



30분 동안 빌린 오리배를 타고 크게 한 바퀴, 작게 몇 바퀴 돌며 호수의 곳곳을 감상했다. 수상이 아니었으면, 호수의 한가운데가 아니었으면 만끽하지 못했을 풍경이 그곳에 있었으니 누구 하나 빠짐없이 그 짧은 30분 동안 들떠있었다. 나 역시.


이제 마음이 좀 풀리네. 오길 잘 했다.




집에 가지 않기로 했다.

호수의 수면도 주변도 만끽하고 나니 날은 저물고, 집 나온 사람들의 심리가 갈등을 시작했다. 집에 갈까 말까 고민하다가, 나이가 많은 순으로 세 명까지 귀가를 반대했다. 열 살, 다섯 살인 둘째와 셋째는 아직 마음의 아기 티를 못 벗은 것인지, 어두워지니 집이 그리운 모양이다.


일단 밥 먹으면서 생각해.


무리하게 설득할 것 없다. 잘 곳이 있는지 알 수도 없으니, 곧장 집으로 가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밥때가 되었으니 일단 먹을 곳을 찾아 나선다.

구불구불 산길을 내려가는 도중 누군가가 드라마 촬영지를 발견하여, 이미 지나친 길을 돌아 가보기도 했다. 돌담 병원. 어둠 속에서 약간의 불 빛만 새어 나오는 병원은 반갑기보다는 귀신만 떠오르게 하니 얼른 다시 밥집을 찾아 나섰다. 불안하게 기름이 부족하다는 경고등이 들어온다.



무작정 가다 보니 딱히 들어가고 싶은 가게도 없고 산에서 차가 멈춰 버릴지도 몰라 낮에 검색해 두었던 맛집을 찾아갔더니 1시간 30분을 기다리란다. 이건 아니다 싶지만 일단 대기표를 받아 들고 기름부터 채우러 간다. 감사하게도 가까이에 주유소가 있다.

마른논에 물 들어가는 소리,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소리만큼이나 빈 연료 탱크에 기름 들어가는 소리가 듣기 좋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냥 밥을 먹기로 했다.

포천은 이동 갈비. 이동 갈비 하면 원조 할머니 이동 갈비라고들 하지만, 이동 갈비촌에 늘어선 가게들은 죄다 원조 할머니 집이니 어디 하나 들어가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우리의 허기는 더 이상 견딜 정도가 아닌데 기름을 넣고 나도 1시간은 더 기다려야 한다니, 포기다. 뭐 대단한 먹거리라고 목숨을 걸 필요는 없다.

맛집에서 주유소로 향하는 길에 봐 두었던 국밥집을 찾아갔다. 마트 옆이라 편안히 주차를 하고 걸어 들어가는데 아주머니가 뒷문으로 나가버린다. 따라서 가게를 통과해 나갔더니 그곳은 신세계.



원조 이동 갈빗집들과는 상관없는 음식점들이, 도로에서 한 겹 안으로 들어간 골목 안에 늘어서 있다. 마음이 편안하고 뭐든지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안도감이 느껴진다. 방금 관통한 가게 사장님께는 미안하지만 다른 가게에 자리를 잡고 기호대로 국밥, 갈비탕을 시킨다. 주인아주머니께 묵을 곳을 알아보니, 바로 옆 여관을 소개하여 주신다. 작은 방이 단 돈 3만 원.


이번 여행은 계획도 없었지만, 돈 쓸 마음도 챙겨 오지 않았다. 다섯 식구가 하룻밤 묵는데 3만 원이면 좀 불편해도 어때. 집으로 가나 마나 고민하던 마음마저 해소가 된 김에 소주도 한 병 시켰다.

 



여관방에 옹기종기 모여 누웠다.

아담한 방이지만 다섯 명이 누울 수 있고 씻을 곳도 있으니, 오늘 밤은 위생에 대해서는 눈감기로 한다. 은근히 풍겨오는 선배 투숙자들의 체취도 친척집에서 느껴본 것과 같다고 생각해 본다. 조금 유난을 떨어, 둘째와 셋째가 자는 요 위에는 차에 넣고 다니던 자리를 한 겹 더 깔아 준다.

엉겁결에 보낸 고단한 하루 덕분인지 잘 잔다. 됐다.


아침에 눈을 뜬 막내는 어제도 했던 질문을 과거형으로 한다.


우리 왜 여기서 잔 거야?


집에 가기 싫었으니까.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날이었으니까 잠깐 딴짓을 해 본 거야.




한적한 시골 마을에 아침부터 객들에게 밥을 차려줄 가게는 많지 않다.

브랜드의 힘은 무시할 수 없는지, 이른 시간에 메뉴도 다양하게 준비되어 있는 김밥천국에서 이번 여행의 마지막 끼니를 해결한다.


이런 게 여행 아니야?


집으로 향하는 길, 갑자기 생겨난 추억 거리를 회상하는 이야기를 나누다가 생각했다.


뚜렷한 계획 없이, 길 위에서 다음 목적지를 정하고 찾아가는 여정. 무엇이든 함께 하는 시간.

여행은 이런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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