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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부는 버드나무 Aug 10. 2021

[어슬렁,남해] 07. 너의 빈 잔에 술을 채워라

일몰 개고생 백패킹팀 1차 시뮬레이션/ 꽃내에서 지족까지 하이킹

다가올 백팩킹 대장정을 위해 체력단련이 시급했다. 팀원들과 우선 숙소에서 1시간 거리인 지족리까지 도보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내리쬐는 태양이 뜨거워도 가로수 그늘이 제법 길고, 구불거리는 이차선 도로의 풍경이 시시각각 바뀌니 지루할 틈이 없었다. 30분쯤 걸었을까. 길가에 걸린 <민속우리막걸리> 간판 앞에서 발을 멈췄다. 


인적 드문 도로 옆 맥락 없이 걸린 간판, 빛바래 갈라진 스티커 글씨, 무심히 놓인 빨간 고무통 속 무성한 텃밭 채소들. 호기심에 이끌리 듯 다가선 미닫이 유리문 앞에는 손으로 삐뚤빼뚤 쓴 종이가 붙어 있었다. 큰 병 만원, 작은 병 팔천 원. 


조심스레 문을 두드리니 기척이 없다. 서둘러 돌아서기 아쉬워 용기 내어 불러본다. "저기요, 계세요?" 몇 차례 더 두드리자 드르륵 문이 열렸다. 낮잠 주무시다 깬 듯한 뽀글 머리 할머니가 심드렁하게 쳐다보신다. "막걸리 있나요? 한 병 주세요. 작은 걸로요." 말없이 돌아선 할머니는 잠시 후 2L짜리 초록색 페트병을 들고 나오셨다. "저희 작은 거 시켰는데요", "이게 작은 거여. 팔천 원" 


현금을 계산하며 혹시 종이컵을 구할 수 있나 여쭤보니 선뜻 내어 주셨다. 집 안이 어수선해서 들어와 마시라고 못해 미안하다며. 할머니가 품은 세월만큼 묵직한 막걸리 한 통을 받아 들고, 경로를 벗어나 오른쪽으로 쭉 뻗은 해안도로를 따라 걸었다. '대체 큰 병은 얼마나 큰 걸까?' 영원히 풀리지 않을 궁금증은 가슴에 묻고. 


길이 그치니 바다가 시작되었다. 지족 해안의 뜨거운 갯내음이 물씬 풍긴다. 방파제 위에 걸터앉아 서로의 잔을 채운다. 멀리 죽방렴이 내다보이는 시원한 풍광을 안주 삼아 지게미가 그득한 탁주를 입에 털어 넣었다. 텁텁하고 투박하지만, 예쁜 척하지 않는 농밀한 맛. 지금 이 순간, 더 이상 필요한 게 없을 만큼 행복하다.


알딸딸한 술기운을 동력 삼아 지족 중심지에 다다랐다. 새로 연 <팥파이스>에서 소담한 빙수 한 그릇으로 더위를 식히고, 간판부터 사람 홀리는 <초록스토어>에서 귀여운 소품들을 구경하고, 남해 유명인사인 <아마도책방>에 들러 한참 책장을 뒤적였다. 책방에서 추천해 준 <우리식당>에 들러 구수한 멸치쌈밥까지 먹고 나니 오늘 하루도 백점 만점. 


한번 더 두드린 끝에 얻은 뜻밖의 즐거움, 길에서 벗어났기에 발견할 수 있었던 소소한 행복. 작은 출발이 사소한 우연들과 만나 큰 만족으로 남은 오늘처럼, 우리의 백팩킹도 그러하면 좋겠다. 시작은 미약하나 그 끝은 창대하기를.     


길 가는 나그네의 발을 붙들었던 연륜 있는 간판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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