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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부는 버드나무 Aug 14. 2021

[어슬렁,남해]10.길 위에선 모두 만났다 헤어지네

남해 바래길 15번 구두산 목장길/ 백패킹

눈을 뜨니 날씨가 화창하다. 거 참, 떠나기 딱 좋은 날씨네. 

늦은 아침을 챙겨 먹고 센터 냉장고와 식품 보관대를 뒤져 간식거리를 주워 담았다. 아몬드 네 줌, 바나나 네 개, 시리얼 반 봉지, 방울토마토 한 봉지, 에너지바와 초콜릿, 냉동고 고장으로 얼다 만 맥주 네 캔과 편의점 족발, 생수통 까지. 이런 게 바늘도둑 소도둑 되는 마음인가. 처음엔 주뼛주뼛 조금씩 담더니 점점 손이 대담해졌다. 가방에 꾹꾹 욱여넣고, 우직한 나귀처럼 등 위에 짊어졌다. 무릇 여행자에게 배낭의 무게는 욕망과 불안의 무게인데, 오늘 우리의 욕심이 꽤나 묵직하구나. 


다른 팀들의 열렬한 환송을 뒤로한 채 양양하게 센터를 나섰다. 땡볕 아래 나란히 걸어가는 네 그림자가 등불뚝이 닌자거북이 사총사 같다. 어떤 모험이 덤벼도 다 이겨낼 것처럼 씩씩한 발걸음. 길가 버스정류장에서 읍내로 향하는 차에 몸을 실었다. 좌석이 넉넉한 버스는 마치 우릴 위해 준비된 전세버스 같다. 눈에 익은 데자뷔 같은 풍경을 지나 읍내 터미널에 도착했다. 다시 바래길 15번의 시작점인 설천면행 버스로 갈아탔다.  


목적지로 향하는 최종 버스를 무사히 탑승하고 나자 안도의 졸음이 몰려온다. 하지만 차창 밖 생경한 풍경이 너무나 아름다워 한 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다. 졸린 눈을 부릅뜨며 창에 다가붙는다. 마침내 종착지인 설천면에 다다랐다. 고적하고 단아한 첫인상, 그간 머물던 삼동면보다 한결 수수하고 무구한 촌맛이 있다. 우연히 들어간 식당에서 소박하고 든든한 점심 백반을 먹은 후 본격적인 도보여행을 출발한다. 


바래길의 시작점은 대체 어디인가. 묵직한 베낭을 짊어진 등불뚝이가 되어 길을 찾는다 ©성


길 지나는 이 하나 없는 한적한 시골 마을, 집과 집 사이 좁다란 언덕길을 구불구불 오르면 어느새 초록바다, 온 세상이 푸릇한 숲길이 시작된다. 새끼들을 등 뒤에 숨긴 채 우리에게 경고의 눈빛을 쏘던 엄마 염소, 눈도 여즉 못 뜬 채 수로에 웅크리고 있던 아기 두더지, 벌처럼 사뿐히 날아와 톡쏘던 축사 냄새, 그리고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는 수풀. 


걷다 지치면 어디서든 주저앉고, 맘이 닻을 내린 곳이면 잠시 멈춰 음미하고, 오르막이 나오면 서로의 숨소리를 구령 삼아 묵묵히 전진한다. 정해진 약속과 규칙이 없어도, 각자의 체력과 속도가 달라도, 충분히 자연스럽고 조화롭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고 했던가. 옆에서 발맞춰주는 이들 덕분에 지금의 내가 어제의 나를 초월한다.


오르막에선 서로의 숨소리를 구령 삼아 묵묵히 걷는다 ©문


길 위에서는 모든 것이 만났다 헤어진다. 농로와 차도가 합쳐졌다 이내 나뉘고, 오르막이 나오면 다시 내리막이 있고, 저 멀리 바다가 보였다 모퉁이를 돌면 어느새 사라진다. 사람 인연도 그러하다. 


더위에 집 앞을 지나는 우리에게 얼음물을 내다 주겠다던 설천면 할아버지, 큰 배낭을 이고 걸어온 우리에게 입장료를 깎아 주고 팔던 생수를 슬쩍 내어준 <양모리학교> 주인 할머니와 본인 차로 갈림길까지 바래다주겠다던 스태프, 주변 맛집과 텐트 칠 만한 곳을 찾아주고 살뜰히 모기향도 챙겨준 <남해각> 직원분, 물회에 전복과 해삼을 덤으로 올려준 넉넉한 <청정횟집> 사장님, 부둣가 옆 테이블에서 실수로 우리를 웃게 해 준 동네 아주머니까지... 모든 우연이 복되고, 스치는 매 순간이 감동이었다. 


'어쩌면 세상은 생각보다 훨씬 호의적인지도 몰라'. 사람에 대한 경계는 낮추고 믿음은 더 키운 하루. 

이곳이 남해라선지 우리가 허름한 백팩커라선지 모르겠지만, 이 길 끝에 삶을 더욱 긍정하게 되리라 예감한다.

     

호텔뷰 부럽지 않던 우리의 첫 밤. 설레임으로 오래도록 잠들지 못한 채 긴 얘기를 나눴다. ©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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