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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부는 버드나무 Aug 15. 2021

[어슬렁,남해]11.소망도 추억도 모두 힘이 있다

남해 바래길 14번 이순신호국길/ 13번 바다노을길 / 백패킹

도로 위를 지나는 차 소리와 아침 운동하는 아주머니들 소리에 일찍 눈이 뜨였다. 간밤 1인용 텐트에서 셋이 부둥켜안고 잠든 덕에 다행히 추위는 없었으나, 백팩킹의 피로와 좁은 잠자리의 불편함으로 몸이 찌뿌둥했다. 본인 텐트를 우리에게 양보하고 홀로 매트 노숙을 한 '근'은 잘 잤으려나. “아이고” 무거운 몸을 질질 끌고 텐트 밖으로 나오니, 눈앞에 말갛게 세수한 듯 산뜻해진 남해대교가 서 있다. 신선한 아침 풍경을 보니 나도 금세 싱싱해진다.


바나나와 두유, 에너지바로 간단히 아침식사를 한 후 다시 길을 나선다. 오늘의 코스는 바래길 14번 이순신 호국길. 내리막길이 나오자 무릎을 아끼려고 다들 지그재그 비스듬히 걷기 시작했다. 맨 뒤에서 서로 어긋어긋 교차하는 등들을 바라보노라면, 마치 내가 우왕좌왕 양 떼를 몰고 가는 보더콜리가 된 것 같아 슬며시 웃게 된다. 


오른편엔 바다가 한없이 이어지고, 왼편엔 작은 어촌 마을들이 계속 스쳐 지난다. 건어물 냄새가 물큰한 갯마을을 지나, 충직한 강아지가 캉캉거리며 경계하는 대문을 지나, 방파제에 양파와 코끼리마늘을 늘여 말리는 아기자기한 마을에 다다르면, 통나무로 지은 오두막 화장실이 나온다. 투박한 외관과는 달리 내부는 제법 깨끗하고 냉난방기 까지 갖춘 신식이다. 예상보다 말끔한 화장실을 만나면 기분도 덩달아 말끔해진다. 


방파제에 양파와 코끼리마늘을 말리던 아기자기한 갯마을 ©성 


걷다 보니 어느 순간 해안이 그치고 마을을 가로지른다. 논둑길 밭둑길을 지나, 우렁이와 개구리와 고양이를 지나, 언덕을 돌고 또 도니, 눈앞에 하늘로 이어지는 듯한 비탈길이 나온다. 마지막 인내심을 시험하는 인생의 관문인가. 모두가 말을 아끼며 묵묵히 걷는다. 내 심장 소리와 거친 숨만 이 세상에 가득하다. 힘들 땐 앞사람 뒤꿈치만 보고 걸으라던 누군가의 말을 기억하며 무한한 시공간 속을 한 발자국씩 내딛는다. ‘나는 왜 지금 여기에 있나’ 실존적 질문을 던지려는 찰나 드디어 정상에 이르렀다.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니 스스로가 더욱 대견해진다. 멀리 내려다보이는 노량대교가 반가워 짐을 벗어두고 번갈아가며 기념사진을 찍었다. 오늘 최고의 풍경이다.


중간 목적지인 이순신순국공원에 다다랐다. 관음포를 바라보는 넓은 부지에 영상관, 체험관, 광장 등 부대시설이 많지만, 지친 우리는 우선 그늘부터 찾았다. 등나무 그늘 밑 벤치를 발견하자 자연스럽게 드러누워 대책 없는 낮잠에 돌입했다. 태양이 이동해 그늘이 사라진 후에야 하나 둘씩 눈을 뜬다. “배고파. 우리 밥 먹자” 본능에 충실한 우리는 성실하게 최단 거리의 식당으로 향한다. 이름마저 비장한 <열두척반상>. 남해 시금치를 넣어 만든 초록색 면이 탱탱하고, 물회와 짬뽕의 어디쯤인 듯한 '냉짬뽕'이 오묘하게 맛깔난다. 든든히 먹고 나니 비로소 주변이 눈에 들어온다. 이끌리듯 매점에 들어가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한 손씩 들고 나왔다. 순식간에 녹아 흘러내리는 아이스크림과 함께 우리의 열정과 의욕도 녹아내린다. 


다음 코스인 바다노을길은 해질녘이 가까워져야 좋을 테니, 일단 여기서 낮잠부터 다시 자자! 모기약을 잔뜩 뿌리고, 얼굴에 수건을 덮고 또 벤치에 누웠다. 무거운 다리, 고단한 어깨, 부른 배와 따순 등, 바람마저 솔솔 부니 수면제가 따로 없다. 

우리만의 시에스타. 공원 벤치에서 꿀처럼 달콤한 낮잠 ©류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행인들이 웅성거리는 소리에 일어났다. "슬슬 출발할까?" 잠들기 전엔  택시로 이동하자던 멤버들이, 깨어난 후엔 그냥 걷자고 한다. 그래, 오늘 한번 갈 데까지 가보자! 


걷고 또 걷는다. 잠시 쉬었다 또 걷는다. 버스 막차도 끊긴 오후 5시, 드디어 체력이 고갈되어 더 걸을 수 없다. '성'이 히치하이킹을 제안했다. 지나는 차가 드물어 막연하게 느껴졌으나 뾰족한 다른 수가 없다. “남해스포츠파크, 유포 방향, 도보여행 중” 장일순 선생 책에서 본 군고구마 장수의 글씨처럼, 서툴지만 정성 가득 담아 팻말을 만들었다. 


파란색 트럭 하나가 우리의 다급한 손짓에 멈췄다. “감사합니다!” 기분도 날고, 목소리도 날고, 몸도 나는 듯하다. 달리는 트럭 뒤에 앉아 바람을 가르고 있자니, 정처 없이 떠도는 방랑자, 끝없는 여정의 여행자가 된 것 같다. 트럭은 유포쯤에서 우리와 작별했다. 운전석 옆자리에 앳된 얼굴의 아들이 타고 있었는데, 그가 나중에 커서 이런 여행도 해보고 두루 세상을 경험해보길 바라며 우릴 태워주셨단다. 더위에 걷다 보면 필요할 거라며 큰 생수도 한통 내주셨다. 아버지의 소망과 아들의 미소가 멀어질 때까지, 그저 손을 흔들었다.


다시 또 걷는다. 적막한 도로 위, 경운기 한 대가 잠시 관심을 보이다 사라졌다. 해가 곧 질 것 같아 다급해진 순간, 카니발 한 대가 우릴 보고 멈췄다. 젠틀한 인상의 중년 남성이 마침 남해스포츠파크를 지난다며 태워주신다. 본인도 젊을 때 도보여행의 로망이 있었다며, 우릴 보니 옛 생각도 나고 부럽다며 웃으신다. 한참 수다를 떤 후에야 목적지에 도착했다. 차로 와도 제법 먼 거리, 걸어왔다면 어땠을까 생각하니 아찔하다. 고마운 마음을 꾹꾹 담아 힘차게 배웅했다. 오늘도 길 위엔 귀한 인연이 참 많구나.     


돌이켜보니 소망도 추억도 모두 힘이 있다. 때론 누군가의 미래가 지금의 우리를 돕고, 때론 누군가의 과거가 오늘의 우리를 돕는다. 언젠가 내 소망과 추억도 누군가에게 힘이 될 수 있기를, 붉게 물드는 노을을 보며 빌어 본다.

하루를 마치고 귀가하는 길, 잠시 도로에 주저앉아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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