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아몬드> 서평
동화 <오즈의 마법사>를 보면 마녀의 마법으로 심장을 잃은 양철 나무꾼이 나온다. 그는 마법사 오즈에게 잃어버린 마음을 되찾게 해달라고 부탁하기 위해 도로시 일행을 따라나선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차가운 양철 가슴이 행여 누군가를 상처 입히지 않을까 늘 걱정하며 작은 생물에게도 해를 입히지 않기 위해 조심조심 걷는, 사실 그 누구보다 상냥하고 따뜻한 존재이다.
소설 <아몬드>를 읽으며 양철 나무꾼이 떠오른 것은 그 같은 아이러니 때문이다. 선천적으로 뇌 안의 편도체가 작게 태어난 윤재, 마치 아몬드처럼 생긴 이 편도체의 이상으로 그는 공포심을 비롯한 전반적인 감정을 느낄 수 없는 감정표현불능증 환자가 되었다. 감정이 없으니 타인의 희로애락을 공감할 수도 없다. 사람다움, 소위 인간성이 결핍된, 말만 들어도 왠지 무시무시한 사이코패스와 실상 다를 바 없는 셈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결핍을 잘 알기에 누구보다도 상대방의 감정과 마음을 이해하려 애쓰며, 타인을 편견 없이 관찰하고 있는 그대로 수용한다.
때때로 결핍은 인간을 더욱 단단하게 성장시키곤 한다. 자신의 부족함을 제대로 마주 보고, 겸손하게 성찰하며,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이들. 이들은 결핍을 약점이 아닌 강점으로 바꾸기도 한다. 물론 결핍에 상심하여 성급히 단념하거나, 결핍이 부끄러워 감추고 속이려 든다면 이는 불가능하다. 아직 완전한 홀로서기가 어려운 아이들이라면 당사자뿐 아니라 부모를 비롯한 주변인들도 그러해야 한다. 윤재가 곤이와 다른 방향으로 걷게 되었던 것은 가족의 진솔하고 인내력 있는 사랑이 이정표이자 가드라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윤재에겐 곤란할 때 원더우먼처럼 나타나 자신을 보호해 준 할머니가 있었고, ‘인간은 교육의 산물’이라는 종교적 신념으로 그가 감정을 배우고 흉내 낼 수 있도록 반복 훈련시켜준 엄마가 있었다. 그가 괴물이 아닌, ‘예쁜 괴물’, ‘사랑스러운 괴물’이 된 것은 그들의 오랜 공로가 크다.
결국 윤재는 아몬드가 정상인 사람들, 본능적으로 감정을 느끼고 공감할 수 있기에 오히려 그 소중함을 깨닫지 못하는 자들, 그를 괴물이라 수근 대며 놀리던 사람들보다 더 인간적이고 더 용감하게 행동했다. 그리고 곤이를 위해 희생하던 그 순간 비로소 자신 안의 둑이 부서지는 것을 느낀다. 세상이 그에게 규정했던 한계, 감정표현불능증이라는 견고한 틀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기적을 이뤘다.
여전히 윤재와 곤이의 삶은 진행형이다. 작가의 말대로 어떤 이야기가 비극인지 희극인지는, 우린 영원히 알 수 없을지 모른다. 입 속에 넣고 굴리면 단맛과 피 맛이 동시에 나는 자두맛 사탕처럼, 어쩜 인생은 기쁨과 슬픔의 끝없는 공존 일지도. 그저 부디, 이들이 걸어갈 길이 볕이 드는 밝은 방향이기를 소망할 뿐이다. 윤재 머릿속 아몬드가 자라길 바라는 마음으로 매일 아몬드를 챙겨 먹이던 엄마의 그 마음처럼, 캘리포니아 아몬드가 머금은 따사로운 햇살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