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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부는 버드나무 Aug 18. 2021

[어슬렁,남해]14.고양이야 잘 부탁해

오늘 하루 촬영 당번 / 고양이 눈인사의 대가

난생처음 액션캠을 들었다. 날마다 한 명씩 돌아가는 촬영 당번, 오늘은 내 차례다. 콘셉트는 일요일을 맞은 살러*들의 다양한 휴식 풍경. 어제 촬영 당번이었던 '한'이 친절하게 캠 작동법을 알려줬으나, 영 손에 익지 않아 어색하다. 특히 이벤트가 발생한 현장에 불쑥 캠을 들이대기가 굉장히 부끄럽고 민망하다. 읍내에서 장보고 복귀하는 팀을 촬영하려다가 무심코 짐을 들어 나르게 되고, 즐겁게 대화하는 현장을 찍으려다가 괜히 훼방꾼처럼 느껴져 '꿔다 놓은 보릿자루'가 돼버리기 일쑤. 특식이 나온 저녁식사 때는 내 입에 집어넣기 바빠 아예 촬영을 깜박하기도 했다.


아, 촬영 기사로서의 내 정체성은 너무나도 하찮구나. 넘어져도 카메라를 먼저 감싸고, 물에 빠져도 본능적으로 카메라를 들어 올리는 그런 프로 정신은 감히 어떤 세계일까. 내 몸보다 소중한 물건을 지닌 이의 마음이란 대체 어떤 걸까? 나는 내 일에서 무엇을 그만큼 아꼈었나? 미지의 영역 문턱 앞을 서성이다, 잠시 내 세상을 뒤돌아본다.




매일 저녁 꽃내 센터 마당을 찾는 점박이 고양이가 있다. 작년 가을에 찍힌 사진 속에도 등장한 걸 보니 우리보다 원주민이다. 특별히 밥을 챙겨주는 것도 아닌데 해 지고 나면 야간 순찰 돌 듯 꼬박꼬박 방문하는 제법 성실한 녀석이다. 마치 센터 현관 계단에 투명한 결계라도 쳐진 듯 넘어오지 않고, 멀찍이서 한참 우리를 바라보다 가는 그가 궁금했다. 


오늘 밤도 그가 찾아왔다. '성'에게 미리 배워둔 고양이 인사 법대로 몸을 낮추고 천천히 눈을 꿈뻑이니, 그도 느리게 꿈벅 눈인사로 화답한다. 살짝 들뜬 마음에 손을 내밀자 슬며시 곁에 다가와 냄새를 킁킁거리던 사랑스러운 녀석이, 돌연 내 중지를 앙 물었다.


"니가 어떻게 나한테 그래?" 실연 앞에 흔한 그 대사가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갑작스러운 반응이 당황스러워 끝내 서러워진다. "이럴 거면 눈은 왜 깜박였고, 살랑거리는 걸음으로 왜 다가온 건데?". 또르르, 손 끝에 피 한 방울, 눈가에 물 한 방울. 


아차차,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혼자 좋아서 설렜다가, 혼자 실망하고 섭섭했다가, 어이없이 배신감까지 운운하려 들다니. 그래... 고작 눈인사 한 번에 너와 감히 친해졌다 여겼다면 인간의 오만함이겠지. 네 사소한 눈짓에 나 혼자 의미 부여하고 성급히 들이댔나 봐. 눈치 없이 널 귀찮게 했다면 사과할게, 미안해 고양아.  


이제 더는 사랑을 조르지 않으리. 가까워지려 서두르지 않으리. 

지금 이 거리에서, 우리 그저 서로를 풍경처럼 오래 바라보자. 


나를 서럽게 한 그 녀석, 새초롬한 아이라인이 매력 포인트


* 살러: 남해군 지원으로 <6주 살러, 남해> 프로그램에 참여한 참가자들을 지칭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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