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바람부는 버드나무 Aug 20. 2021

[어슬렁,남해]16. 염치는 없어도 흥은 많지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키고, 못생긴 나무가 숲을 지킨다고 했던가. 때론 쓸모없음이 쓸모가 되기도 하고, 하자 덕분에 득을 볼 때도 있다. 지난주 룸메이트 바꾸기 때 내가 딱 그랬다. 여자 살러*들을 위한 방은 2인실 세 개와 3인실 한 개인데, 그중 유일한 3인실은 2인실 면적의 네 배쯤 되는 파격적인 쾌적함을 자랑했다. 모두가 꿈꾸는 파라다이스 3인실. 하지만 우리 중엔 하자 있는 룸메이트, 즉 다른 이들이 동거를 기피하는 빌런들이 있었으니 바로 나, '문', '성'이다. 우리는 각자 코를 심하게 골거나 이를 가는 결격 사유가 있었다. 육지의 평화를 위해 폭탄들을 모아 무인도로 보내고픈 살러들의 마음이 우리를 3인실로 보내려 했다. 이 왠 마른하늘에 꽃비인가. 할렐루야!


엉겁결에 3인실 티켓을 쥔 나는 신나서 이사 준비를 했다. 드디어 국화방에서 원추리방으로 이사하는 날. 기존 룸메이트였던 '문'에 새롭게 '예'가 합류했다. 다리를 다쳐 거동이 불편한 '예'에겐 독방과 화장실이 갖춰진 3인실이 필요했기에, 잠자리 빌런 중 비교적 약체였던 '성'이 탈락했다. 


좁은 2인실에서 광활한 3인실로 옮기니 졸지에 벼락부자가 된 기분이다. 뭐랄까, 시청 앞 잔디광장 한가운데 돗자리를 펴고 자는 기분이랄까. 이렇게 좋은 곳을 두고 그렇게 답답하게 지냈나 싶어 뜬금없이 원통하기도 하고, 개구리 올챙이 적 모르더라고 편히 잘 지냈던 예전 방이 갑자기 초라하게 여겨졌다. 사람 마음이란 이렇게나 간사하고 염치가 없다. 


짐을 대충 정리하고 나니 살러들이 하나둘씩 우리 방에 모여들었다. 그간 이곳에 묵다 떠난 이들은 상실감을 달래려 오고, 계속 2인실에만 묵게 된 이들은 부러움에 오고, 멤버들이 통 안보이니 여기 있나 궁금해서 찾아온다. 자연스럽게 사람이 모이고 집들이 분위기가 되니 노래가 빠질 수 없다. DJ '예'의 선곡에 맞춰 노래를 흥얼거리다 보니, 어느덧 거대한 떼창이 되어 흥이 폭발한다. 누군가 발 빠르게 가져온 반짝이 조명까지 설치하니 자연스럽게 클럽으로 변신. 둠칫 둠칫 들썩이는 아마추어 춤꾼들 사이, 그간 정체를 숨기고 있던 특급 댄서 '채'가 본모습을 드러냈다. 스포트라이트와 환호를 그녀에게! 공연 무대로 돌변한 거실이 후끈하다. 


무심코 던진 작은 불씨가 마른 들판을 모조리 태워버렸다. 오늘 우리가 이 뜨거운 밤을 놓쳤다면 얼마나 아까웠을까. 용감한 누군가가 몸을 먼저 흔들어주지 않았더라면, 6주가 다 가도록 우리가 '채'의 춤을 보지 못했더라면 얼마나 억울했을까. 결국 우리의 흥겨움은 자정을 넘겨서야 진정되었다. 떠나기 못내 아쉬워하는 그들을 배웅하며, 앞으로 우리 방에서 종종 무알콜 클럽을 열기로 결의했다. 식지 않은 열정아, 아직 남은 신명아, 오늘 밤은 이제 그만 잠들거라.


3인실 입성 후 잔뜩 신난 우리의 그림자 놀이, 광활한 거실에서 ©금



* 살러: 남해군 지원으로 <6주 살러, 남해> 프로그램에 참여한 참가자들을 지칭함

매거진의 이전글 [어슬렁,남해]15. 아름답길 바라는 마음은 늘 따뜻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