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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부는 버드나무 Aug 23. 2021

[어슬렁,남해]17.유물 같은 바람이 풍요한 남해에선

남해 바래길 10번 앵강다숲길/백년유자,월포해수욕장, 용문사, 앵강만

오늘은 남해 바래길 10번 앵강다숲길 코스를 걷는 것이 우리의 목표다. 다른 일정이 있는 '근'이 대신 '찬'이 일일 멤버로 동행했다. 마침 남면에 볼일이 있다던 청년단체 대표님의 차를 운 좋게 얻어 타고 나온 후, 도보여행이 처음인 '찬'을 위해 우선 점빵에 들렀다. 필수품인 밀짚모자와 팔토시를 착장 시키고 나니 이제야 안심이 된다. 남면 중심가에 새로 문을 연 카페 <백년유자>에 들러 새콤달콤 유자몽 에이드를 한 잔씩 들이킨 후, 눈부시게 화창한 태양 볕 아래로 길을 나섰다.


좌우로 끝없이 펼쳐진 너른 초록 논, 그 양쪽 끝엔 각각 어김없이 푸른 산과 바다가 버티고 있다. 밭일 후 그대로 벗어서 거꾸로 꽂아 둔 파란 장화, 벼 기둥에 몽글몽글 붙어있는 핑크빛 우렁이 알, 농수로 고랑마다 그득한 올챙이와 청개구리, 하늘을 까맣게 수놓고 일렁이는 잠자리 떼, 우아하고 날렵한 날갯짓의 백로 커플. 한적하고 평화로운 풍경들을 거닐다 보면 마치 여느 일본 영화 속 장면처럼 나른하고 아름답다. 


이십여분 쯤 걸었을까. 도로 위 커다란 표지판이 월포해수욕장으로 안내한다. 이끌리듯 바다에 다다르니 마치 쿠바 아바나의 말레콘처럼 긴 방파제가 해안을 가로지르고 있다. 방파제에 걸터앉아 서로 말없이 한참 동안 바다를 바라보았다. 저 끝없는 바다의 시원은 어디일까. 아득해지는 기분으로 눈을 감자, 진한 해초 향 듬뿍 머금은 바람이 온몸을 감싼다. 아무도 찾는 이 없는 몽돌해변의 시간이 멈추고 온 세계가 숨 죽인 듯 고요하다. 멀리서 우는 바닷새 소리, 귓가를 스치는 바람소리만이 세상의 공백을 가득 채운다. 


말없이 한참 동안 바다를 바라봤다. 차 타고 지나가다 멀리서 우릴 발견한 '석'이 몰래 찍어준 사진 ©석


땀을 한 숨 날린 후, 해변의 돌멩이를 살피는 '문'을 따라나섰다. 숱하게 치이고 부딪혀서 귀퉁이가 모두 닳아버린 거무튀튀한 몽돌들. 하지만 엇비슷해 보이는 그 돌들 사이에도 유독 눈길을 끄는 독특한 얼굴들이 있다. 햇빛에 데워진 누렇고 둥글납작한 표면은 구슬땀 흘리며 그을린 누군가의 이마처럼 뜨겁고, 한쪽 구석에 까맣게 번진 얼룩은 상처 입고 멍든 마음 같아 괜스레 서럽다. 이렇게 단단한 영혼도 세상 풍파에 상처 받아 아프구나. 그래, 내가 시렸던 것도 네가 아렸던 것도, 우리가 나약해서가 아니었나 봐. 그저 그럴만한 상황이었던 게야. 


해수욕장 끄트머리 어촌 담장에는 낭창낭창한 주홍색 능소화가 발걸음을 붙잡는다. 쪽빛 푸른 바다와 어우러지니 그 쨍한 대비가 더욱 눈부시다. 옛날에는 양반집 마당에만 키울 수 있어 '양반꽃'이라고 불렸다는 고운 꽃. 하도 예뻐서 자기 집 담장에 심었다가 관아에 끌려가 매를 맞았다는 아무개의 이야기를 듣고 나면, 화염처럼 붉은 그 빛깔이 마치 가닿지 못할 어딘가를 향한 이글거리는 열망과 한숨 섞인 오래된 동경을 삼킨 듯하다.  


갯마을을 벗어나 언덕길로 이어지는 해안도로에 다시 진입했다. 왼편에는 공작새를 닮은 연분홍빛 자귀나무가 바람에 살랑거리고 오른편은 아기자기한 펜션들이 바다를 향해 줄 지어 있다. 세상 어디든지 전망 좋은 곳은 숙소와 음식점이 독차지하게 마련이구나. 걷다 보니 어느덧 이동면으로 진입했다. 이곳은 해안도로 군데군데, 곁가지로 바다까지 쭉 뻗은 마을길들이 있다. 바다를 향해 직선으로 내달리는 뻥 뚫린 시야가 상쾌하고, 빛바랜 회색 아스팔트, 싱싱한 연초록빛 논, 하늘을 닮은 파란 바다의 색감이 너무나 조화롭고 아름답다. 길바닥에 주저앉아 서로의 사진을 몇 장이고 찍어줬다. 


여기서부터는 이제 40분 정도만 더 가면 앵강다숲. 하지만 잠시 후 수국 정원이 유명한 용문사 길목을 지난다는 '찬'의 말에 솔깃하여, 즉흥적으로 이동 경로를 틀었다. 이왕 근처 온 김에 들렀다 가지 뭐! KFC 할아버지를 닮은 뚱뚱한 자유의 여신상이 지키는 미국마을 입구를 통과하여 호구산을 한참 올랐다. 지칠 줄 모르고 계속 이어지는 경사, 바닥이 드러난 물통을 보자 더욱 극심해진 갈증, 슈퍼도 가게도 없는 시골 산길 중턱에서 문득 사막을 떠올린다. 아, 목마름의 고통과 신기루를 부르는 두려움이란 이런 느낌이구나. 더 이상 못 가고 주차장에 쓰러져 잠깐 엉덩이를 붙이려니, '찬'이 해가 곧 질 것 같다며 재촉한다. 체력과 속도가 엇비슷해 항상 후미에서 나란히 걷는 '성'과 함께, 입을 앙 다물고 다시 산을 오른다. 멈추면 죽는다는 비장한 마음으로, 몸이 아닌 정신력과 깡으로 걷는다. 


주차장에 털썩 주저앉은 우리. 조금만 더 가면 된다는 '찬'의 말을 더 이상 믿지 못해 핸드폰으로 경로 확인 중. ©문


마침내 용문사에 다다랐다. 입구 앞에서 또다시 드러누워버린 '성'을 잠시 기다렸다가 끌고 들어갔다. 문을 통과하자마자 약수터로 달려가 물 네 바가지를 정신없이 들이켰다. 이제야 좀 살 것 같다. 고개를 드니 바로 앞에 무인 쉼터가 보인다. 오래된 대웅전이고, 아름다운 수국 정원이고, 아이고 모르겠다. 일단 만사를 제쳐두고 쉼터로 향했다. 편백나무 향이 은은한 목재 건물은 최근 지어진 듯 깨끗하고, 감사하게도 냉온수기와 커피, 녹차가 구비되어 있었다. 긴급 당 보충을 위해 평소 마시지 않는 믹스커피를 한 모금씩 나눠 마신 후, 너 나 할 것 없이 마룻바닥에 누웠다. 열이 좀 식은 듯 하자, 부지런한 '찬'이 다시 재촉하여 느릿느릿 몸을 일으켰다. 


사찰은 묵은 세월의 깊이가 느껴지는 대웅전 외에는 대부분 신축 혹은 개보수 중이라 큰 감흥이 없었다. 뒷동산의 수국도 어느덧 많이 져버렸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만개였다는데 절정의 아름다움을 놓쳐서 아쉽다. 하지만 정원 옆 산비탈의 울창한 소나무, 그 아래 층층이 물결치는 듯한 녹차밭, 뒤돌아섰을 때 저 멀리 눈에 담기는 청청한 바다 풍경에 충분히 위로받는다. 대리석으로 세워진 거대한 지장보살 앞에서 익숙하고 오랜 소원을 빈 후 가벼운 마음으로 돌아섰다. 


하산하는 길은 올라온 길과 다르게! 백패킹팀의 취향은 언제나 내 맘 같다. 담장이 낮은 아담한 마을을 지나 다시 해안도로에 합류한다. 30여분쯤 더 걸으니 앵강다숲 마을이 나왔다. 해가 뉘엿거리기 시작한다. 길가의 작은 집, 마당에 무심히 놓인 의자 밑에는 고양이 새끼들이 깡총거리며 뒹굴고, 꼬부랑 할머니가 늙은 발바리한테 간식을 먹이러 나온다. 귀한 혈통이 아니더라도, 비싼 사료와 예쁜 옷은 없어도, 한 사람으로부터 한 세월 변함없는 애정을 받아온 개. 세상 부러울 것 없는 소박하고 행복한 삶이란 바로 저런 것이 아닐까. 


드디어 최종 목적지인 앵강다숲에 다다랐다. 수백 그루의 상수리나무가 사는 오래된 방풍림이라고 전해 들었는데, 현재 보호수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색색 테이프를 이용한 설치미술 전시 중이라 본래의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은 느낄 수 없었다. 대신 해가 낙하해 어둠이 번지는 갯벌을 바라보며 '성'의 요청대로 천천히 춤을 췄다. 밤이 기지개를 켜는 푸르스름한 배경 위에 내 동작이 검은 그림자처럼 담겼다. 긴 뻘밭에 아치형으로 드러누운 두 개의 석방렴은 태고의 시간을 묶어둔 것 같다. 유물 같은 바람이 풍요로운 이곳 남해에서, 나도 조금씩 더 자유로워지고 싶다.   


밤이 기지개를 켜는 앵강만. 일정을 무사히 마친 홀가분한 기분, 몸은 무거워도 마음은 가볍다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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