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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부는 버드나무 Sep 02. 2021

[어슬렁,남해]26.아예 젖기로 마음먹으면 홀가분한걸

꽃내에서 양화금 까지 도보여행/ 즉흥 물놀이/ 오늘도 뒤풀이는 <뚱이네>

애초에 우리 계획은 바래길 2번 코스 비자림해풍길이었다. 일기예보에 비 소식이 있어 우천 시 도보가 편한 코스로 골랐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 아침에 눈을 뜨니 햇빛이 쨍쨍하다. 날씨가 맑은 것을 보니 난이도 최저 코스를 걷기가 아쉬워졌다. 약속된 출발시간에 집결해 긴급회의를 열었다. 없는 고생도 사서 하는 우리 백팩킹팀이 '난이도 별 한 개'짜리 코스를 걷긴 아깝지! 결국 센터에서부터 양화금 마을, 물건항을 거쳐 미조항까지 걸어보기로 했다. 말로만 듣던 물미해안도로를 드라이브가 아닌 도보로 도전해보는 것이다. 오늘의 일일 멤버 '수'와 함께 배낭에 간식과 물통을 챙기고, 우리 팀의 드레스코드인 쿨토시를 팔에 껴입고 힘차게 출발한다. 


노을을 보러 자주 거닐던 꽃내 항구가 낮에 만나니 조금 생경하다. 선착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산모기 밀집구역 언덕을 넘어, 해송이 가득한 산등성이를 지나, 양화금 마을에 입성했다. 옥상 위 빨랫줄에 가지런히 널린 빨래가 정겹고, 아담한 포구에 쉬고 있는 배들이 소박하다. 전체적으로 아기자기한 분위기의 마을이다. 잠시 멈춰 풍경 사진을 찍으며 숨을 고른다. 다시 걷다 보니 바닷가 펜션이 옹기종기 모인 작은 해변이 나왔다. 지나치기가 못내 아쉬워 발걸음이 쉬이 떨어지지 않는다. '근'이가 잠깐 바닷가에 내려가 보자고 제안했다. 모두 같은 마음이었던지라 흔쾌히 따라나섰다. 


마을에 들어서니 모자를 눌러쓴 멋쟁이 할아버지가 "이 더위에 여기서 뭐하냐?"며 말을 건넨다. 도보 여행 중 마을이 너무 예뻐서 내려왔다고 하자 껄껄 웃으신다. 한창 펜션 공사 중인 곳을 지나 바다에 다다르니 아무도 없는 몽돌 해변이 참 고즈넉하다. 뭍에서 바다로 흘러든 물줄기가 돌멩이 밭을 지나며 샬샬샬 온유한 소리를 낸다. 실개울 옆 바위에 앉아 발을 담그자 금세 온몸이 청량해진다. '수'와 '근'이 바다에 살짝 발을 담근 채 우리에게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그러나 왠지 발만 담그기에는 성에 차지 않았다. “난 그냥 이대로 들어갈래!” 거칠 것 없이 호젓한 마음으로 바다로 걸어 들어간다. 주머니에 돌멩이를 가득 넣은 채 강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간 버지니아 울프가 된 기분이다. 


비 오는 날 우산을 쓰고 가다 어깨에 빗방울이 떨어지면 찝찝하지만, 아예 우산을 버리고 빗속으로 걸어 들어가면 해방감을 느끼곤 했다. 지금 맨몸을 내던진 바닷속에서도 두 발의 구속이 끊긴 듯 홀가분하다. 파도는 해안선을 왈칵 덮쳤다가 뭍의 모든 욕망을 갈고리로 한 움큼 긁어내며 빠르게 후퇴한다. 그 속에서 엎치락뒤치락 나뒹굴며 다시 어린아이가 된 듯 까르륵거린다. 세상의 모든 근심 앞에서 전전긍긍하지 않고 이렇게 초연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옷이 젖을까 봐 처마 밑에서 발 동동 구르기보다는, 그깟 지나가는 소나기 잠깐 맞고 뛰어가면 그만이라고 웃을 수 있다면 우린 얼마나 더 자유로울까.    


정신없이 파도타기를 하며 놀다 보니 어느덧 허기가 진다. “우리 오늘 그만 걷고, 그냥 밥이나 먹으러 갈까?” 누군가의 제안에 다들 한소리로 외친다. “좋아! 고기 먹으러 <뚱이네> 가자!” 여기서 꽃내 센터까지 되돌아가려면 한 시간, 다시 지족까지 걸으면 또 한 시간. 밥 먹으러 두 시간을 걸어가다니! 서울에서라면 엄두도 못 낼 거리지만, 괜찮다. 여긴 남해이고 우린 ‘일몰 개고생 백팩킹팀’이니까. 


신나게 물놀이 후 젖은 몸을 땡볕에 말리는 중. 맥반석 구이가 된 것 마냥 등이 뜨끈했다. ©수


양화금마을에서 다시 꽃내로 돌아오는 길. '우리 집' 센터를 지나칠 땐 그냥 들어가 씻고 한숨 자고 싶은 마음도 일었으나,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고 격려하며 유혹을 떨쳐냈다. 역시 뜻 있는 자들과 함께하면 목표를 향한 집념은 더욱 강해지는 법이다.


오늘은 지족에 가는 새로운 길을 발견했다. 길잡이 '근'이 덕분이다. 매번 다니던 이차선 도로 갓길이 아니라, 유스타운 뒤편에 난 오솔길이었다. 나무들이 아치를 이룬 터널 같은 숲길을 지나, 바람이 쓰다듬으면 초록 강아지 털처럼 부드럽게 흔들리는 논을 지나, 둥글넓적하고 반들반들한 연잎이 가득 찬 연밭을 지나면 드디어 지족 방파제가 시작된다. 지난번 막걸리 한 통을 사들고 찾아왔던 그 방파제다. 바다 위로 저녁놀이 길게 몸을 뉘이고 투명한 윤슬이 물 위를 톡톡 두드린다. 출렁이는 잔물결이 어느새 내 마음까지 닿아 가슴이 찬찬히 일렁인다. 


아아, 이렇게 또 하루가 저무는구나. 해가 지는 아름다운 풍경을 또 한번 눈에 담을 수 있어 행복하다. 매일 배달되는 이 찬란한 순간을, 팍팍한 도시생활에 지쳐 상자도 열지 못한 채 폐기해버렸던 지난 날들. 이제 되돌아가더라도 상자 속 빛나는 선물을 기억하길, 종종 시간 내어 열어보고 그 안의 기쁨을 다시 맛보길 소망한다.


일과를 성실히 마친 배들이 사이좋게 쉬는 바닷가, 오늘도 선물 같은 하루가 저물어간다. ©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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