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산 보리암/쌍홍문/장군암/남해산장/상사암
어느 지역의 관광 1번지, 관광객 필수 코스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공간에 압도되기보다는 사람 수에 압도되는 경우가 많고, 필터나 보정으로 실제보다 너무 근사해진 사진 때문에 정작 실물을 보면 실망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해 대표 관광지인 <금산 보리암>도 이제야 왔다. 외지에서 방문한 관광객을 위한 배려의 차원에서, ‘그래도 남해에 왔으면 여기는 가봤다 해야지’ 싶은 현지 가이드의 심정으로.
단체 관광객을 피하고자 이른 아침 보리암을 찾았다. 주차장은 아직 차가 열 대도 차지 않아 한가했다. 새벽에 내린 비로 안개가 자욱해 입구까지 가는 길이 뿌옇다.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운무를 해치며 조심조심 내딛는 길이 마치 내 인생 같다. 숨이 깔딱거리는 고개를 넘고 나서야 보리암 절에 도달했다. 깊은 산속 조용한 암자야 특별할 게 없지만, 보리암은 주위 구석구석 숨겨진 이야기들이 매력적이다.
이성계가 조선 건국 전 백일기도를 드렸다는 곳에 세워진 <남해금산영응기적비>. 가는 길이 어찌나 오르락내리락 힘들던지 '매일 이곳을 오르내린 정성이면 내가 신이라도 기도를 들어줬겠네'하는 마음이 절로 들었다. 힘들게 겨우 도착했는데 구름이 너무 자욱하다. 높이조차 가늠되지 않고 주위의 전망도 하나도 안 보인다. 허탈한 마음에 주저앉아 물을 벌컥대고 있으니 인자한 바람이 살짝살짝 구름을 밀어내 줬다. 벌어진 구름 틈새로 비치는 경관에 나도 몰래 감탄을 내뱉는다. 진득하게 기다려야만 볼 수 있는 은밀한 아름다움이 더욱 유혹적이다. 날이 맑았다면 금방 쑥 훑고 지나쳤을 곳을, 날이 흐린 탓에 도리어 오래 머물며 새겨 보게 된다.
무지개 두 개가 뜬 것 같다는 <쌍홍문>은 안에서 밖을 내다보는 풍경보다,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는 풍경이 더 멋있다. 볕이 드물어 축축한 이끼로 뒤덮인 돌 사이를 아슬아슬 건너 나오면 근엄한 표정으로 입을 앙다물고 긴 칼을 허리에 찬 거대한 <장군암>을 만날 수 있다. 마치 영웅의 해골을 지키는 충직한 장수 같기도 하고, 죽어서도 용서받지 못한 자의 해골을 지키는 비통한 수문장 같기도 하다. 영적 기운이 전무한 내가 보기에도 신령스러운 분위기와 강한 기운에 압도된다. 여기저기 “무속행위 금지” 팻말이 붙은 것을 보면 나만의 공연한 느낌은 아니었나 보다.
보리암으로 다시 올라와 <해수관음상>을 만나러 간다. 우리나라 3대 관음 성지로 불리는 보리암의 관음보살은 누구든 소원 한 가지는 꼭 들어주기로 유명하다. 언제 어디서건 소원 성지로 유명한 곳 앞에 다다르면, 결국 빌게 되는 것은 늘 매한가지다. 공손히 두 손을 합장한 채 소박한 마음으로 익숙한 기도를 올린다.
"컵라면 먹고 갈래?". 목표가 생기자 <남해산장>까지 가는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이른 시각이다 보니 다행히 손님이 드물다. 마루 옆 방에서 누워계시는 할머니를 조심스레 깨워 컵라면을 받았다. 라면에 온수를 받고 있자니 어디서 왔는지, 나이는 몇인지, 결혼은 했는지 물으신다. 얼른 아이 낳으라며 웃는 할머니 얼굴을 보니, 평소라면 질색팔색 했을 잔소리들도 정겹게 느껴진다. 할머니가 추천한 명당자리에 앉자 짙은 안개가 말끔히 걷혀 <상주은모래비치>까지 한눈에 가 닿는다. 이 얼마나 호사스러운 컵라면인가! 자연이 대가 없이 만들어준 멋진 풍경들이 거대 자본에 점령당해 값비싼 핫 플레이스로 바뀌는 요즘, 부지런히 발품 팔면 다다를 수 있는 아름다운 곳이 여전히 남아있다는 것이 새삼 고마워진다.
우리의 마지막 목적지는 명칭부터 궁금증을 자아내는 <상사암>이다. 상사병에 걸린 남자가 여인과 이 바위에서 사랑을 맺었다는 전설도 있고, 주인집 딸을 몰래 사랑하다 상사병으로 죽은 머슴이 뱀으로 변신해 딸을 옭아매는 바람에 이 바위에서 굿을 해 떨어뜨렸다는 전설도 있다.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이 사람을 홀릴 만큼 절경이라 상사병에 걸린 자는 오르지 못하게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과히 숱한 전설을 흩뿌릴 만큼 매혹적이다. 주위에 널린 기암괴석과 사방이 훤히 둘러 뵈는 시원한 전망을 보고 있노라면 여태까지 흘린 땀이 아깝지 않다. 왜 금산 보리암이 "남해 관광 1번지"로 사랑받는지 실감 난다. 저 멀리 개미처럼 움직이는 자동차와 아기자기한 미니어처 같은 집들을 바라볼 땐 속세의 눈이 아닌 선계의 눈으로 세상을 관조하게 된다. 조금은 의젓해진 기분이다.
정오가 넘어 하산하는 길, 아침에 자욱하던 운무는 모두 사라지고 언제 그랬냐는 듯 쨍한 태양이 이글거린다. 우리네 인생도 곧 맑게 개기를, 자비로운 관세음보살님을 한 번 더 마음속에 되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