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바람부는 버드나무 Sep 09. 2021

[어슬렁,남해]30.누구에게나 보편적이고 특별한 기억

물건리방조어부림/돌창고프로젝트시문/남해대교/남해각/청정횟집

새벽녘 불현듯 눈이 떠졌다. 서둘러 암막커튼을 제쳐보니 수평선 왼편에서 어슴푸레 푸른빛이 퍼지고 있었다. 남해 살이 4주 만에 드디어 일출을 볼 기회인가! 시계를 보니 아직 해돋이까지 25분 정도 여유가 있었다. ‘잠깐만 눈을 붙여볼까’하는 짧은 유혹이 일었으나, 단호히 떨쳐내고 푸른 숄을 챙겨 테라스로 나왔다. 


방갈로 테라스에 놓인 캠핑의자에 누워 서서히 밝아오는 바다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어릴 적 새해가 되면 아빠의 성화에 못 이겨 눈 비비고 차에 올라타 해돋이를 보러 가던 기억, 수능 마치고 친구와 일출 보러 정동진 기차여행을 떠났던 추억, 치앙마이 어느 산골 마을에서 오들오들 떨며 해를 기다리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때론 잔뜩 기대했던 일출이 구름에 가려 실망을 안고 돌아오기도 하고, 때론 잠에 취해 좀비처럼 멍하니 서있다가 찬란한 여명에 감긴 눈이 번쩍 뜨이기도 했었다. 안타깝게도 오늘은 하늘 가득 뒤덮은 해무에 가려 태양의 민낯을 만날 순 없었지만, 공중에 천천히 퍼지던 푸르스름하고 불그스름하던 아침 빛의 고요가 참 좋았다.


지난번 홀로 다녀온 <물건리방조어부림>의 여운이 길어서, 오전에 친구와 함께 산책을 나섰다. 오랜 나무가 일군 그늘 밑을 거닐며, 바다 내음 가득 담은 바람을 맛본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면 언제나 바다는 거기 있다. 지금의 짙푸른 여름 녹음도 좋지만, 연한 새순과 봄꽃이 막 돋아나는 봄의 싱그러움도 예쁘겠지? 단풍이 짙게 물든 가을의 처연함도 아름답겠지? 그 계절의 풍경들을 언젠가 여기서 다시 마주하고 싶다. 


어제 방문했던 <돌창고프로젝트 대정>이 너무 좋았대서, 오늘은 <돌창고프로젝트 시문>으로 향했다. 압도적인 분위기의 대정 돌창고에 비하면 시문 돌창고의 '애매하우스'는 다소 차분하고 담백한 느낌의 카페이다. 하지만 철 따라 바뀌는 수채화 같은 자연이 담긴 너른 창이 아름답고, 테이블 간격이 널찍해 한결 쾌적하다. 오랜만에 맛보는 진한 커피와 쫀득한 가래떡으로 요기하고, 기념품 선반에 진열된 <마파람사진관>의 남해 사진엽서도 구매했다. 아직 손님이 몰려오기 전 한가로운 카페의 시간들은 언제나 만족스럽다.


친구와 함께한 남해여행의 마지막 식사는 남해대교가 보이는 <청정횟집>에서였다. 2주 전 바래길을 걷다 우연히 들렀던 그곳. 온종일 땀 뻘뻘 흘리며 걷다가, 야영처에 배낭을 풀어놓고 홀가분히 먹었던 시원한 물회. 하루를 무사히 마친 뿌듯함과 인심 좋은 사장님의 서비스에 흥이 올라 쉼 없이 술이 들어가던 그곳. 그 기억이 나를 다시금 이곳으로 이끌었다. 너무 맛있어서 다시 왔다고 하자 사장님이 더욱 반겨주셨다. 지난번 그 자리에서 그 풍경을 다시 만난다. 야경이 아닌 한낮의 모습이지만, 열린 창으로 맞바람 치는 해풍이 선선해서 에어컨이 필요 없었다. 빨간 소라가 덤으로 올라온 물회와 서비스로 나온 통문어 숙회 한 접시. 역시나 이번에도 다음번 방문을 미리 다짐하며 먹을 수밖에 없다. 


남해대교가 바라보이는 <청정횟집>에서의 시원한 물회. 맛, 전망, 인심 모두 만족스러운 내 단골집.  ©류 


<남해각>에 다시 온다면 지난번 우리를 도와주신 직원 분을 만나 뵙고 싶었다. 우리가 바래길을 계속 걸을 수 있었던 것은 당신의 친절함이 동력이 되었다고, 남해를 따뜻한 사람들의 고장으로 기억하게 된다면 그 시작은 분명 당신 덕분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시원한 음료수 한 병을 사들고 설레는 마음으로 찾아갔지만 아쉽게도 재회하지 못했다. 대신 문화해설사로 근무하시는 다른 분께서 열정적으로 남해를 소개해 주셨다. 바래길을 걸었다고 말씀드리자 직접 바래 앱을 켜서 사용법을 설명해주시는데, 고향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일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졌다. 


남해각에서 진행 중인 전시 <남해각 일상의 역사>는 기대보다 훨씬 풍성하다. 남해 사람들이 저다마 품고 있는 남해대교와의 추억을 한데 모아 기워보니 거대한 색동 조각보가 완성된 듯하다. 모두의 삶 속에 공통적으로 들어 있는, 하지만 각자에게 서로 다른 추억으로 남은 존재. 남해대교는 남해인들에게 아주 보편적이면서도 매우 특별한 기억이다. 쉽게 변해가는 세상 속에서 때로 우린 그저 그 자리에 변함없이 존재해 주는 것들에게 고마울 때가 있다. 항상 그곳에 서 있기에 바라보면 마냥 안심하게 되는 존재. 외지에 나갔다 되돌아오는 길, 저 멀리 남해대교가 눈에 들어오면 '아, 드디어 우리 집에 왔구나' 안도하게 만들었다는 그런 존재. 왠지 모르게 애틋한 감동이 마음속에 번졌다. 새삼 남해 사람들이 부러워지기도 했다. 서울 사람들에겐 무엇이 그런 존재일까? 남산이나 시청광장, 아니 한강일까? 내 고향에서는 무엇이 그런 존재였던가? 


전시를 다 둘러보고 나오니 ‘빨강 문’ 남해대교가 더욱 예뻐 보인다. 우리도 대교 입구에서 한 컷, 남해각 옥상에서 부감으로 한 컷 기념사진을 남겨보았다. 이제 우리 둘의 역사에도 남해대교가 특별한 기억으로 남겠지.


남해의 첫 관문 남해대교. 모두의 기억 속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각자의 마음속에 특별한 추억으로 남은 존재. ©류


매거진의 이전글 [어슬렁,남해]29.보리암에 오면 마음이 의젓해진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