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의 한가한 하루/ 단풍나무길 야간 산책/ 불멍과 버터콘 구이
아무 스케줄도 없는 날, 때론 약간의 무료함이 반가운 날도 있지. 지난 주말부터 계속 이어진 여행과 나들이 일정에 몸이 지쳤는지 뜻밖의 공백이 좋았다. 살러*들이 자차로, 카라반으로, 대거 <상주은모래비치>를 향해 떠나고 오랜만에 적막해진 센터. 네 명만 남은 이 한적한 오후가 낯설지만 싫지 않다.
밀린 일기도 쓰고, 가족들에게 안부 연락도 돌리고, 빨래도 하고... 책 한 권 들고 근처 카페로 나가볼까 싶다가도, ‘일주일에 하루쯤은 방콕 해야지’ 싶어 도로 주저앉는다. 신나는 액티비티도, 못 가본 낯선 장소도, 새로운 경험의 축적도 좋지만, 가끔은 이렇게 우두커니 멍한 시간을 흘려보내고 싶다. 한 주간 마구 쌓아둔 추억도 찬찬히 되새기며 정돈하고, 막무가내 상승세였던 흥분도 잠시 가라앉히고.
'한'의 성실한 프로젝트 수행(일명 '새로운 레시피 도전하기') 덕분에 오늘도 즐거운 저녁식사! 양배추, 베이컨, 올리브, 옥수수 통조림, 파슬리, 계란 등 냉장고 속 남은 재료를 몽땅 넣고 볶은 후, 치즈를 듬뿍 뿌려 오븐에 살짝 구웠다. 멕시칸 음식처럼 색감이 다채롭고 풍미가 좋았다. 식사 후엔 대표님의 즉흥 제안으로 단풍나무 가로수길에 야간 산책을 나섰다. 개울 옆 산책로를 따라 쭉 가로등 불빛이 하나둘씩 켜지자 제법 운치 있고 고즈넉하다. 거리의 가로등이 귀한 남해에서 깔끔하게 잘 다듬어진 야간 산책로를 거닐고 있자니 왠지 도회적인 느낌이 난다. 우리 동네 근처에 이런 곳이 있었나? 여전히 새로운 미지의 장소가 많다는 건, 아직도 숨어있는 보물찾기 쪽지가 많은 듯해 가슴이 설렌다.
센터로 돌아오는 길 아이스크림을 사러 들른 <그린마트>에서 옥수수 다섯 개를 얻어왔다. 예전에 도보여행 중 지나쳤을 땐 우릴 경계하듯 쌀쌀하게 대하시던 사장님이 오늘 대표님과 동행했더니 매우 다정하시다. 역시 동네 주민 인센티브란 이렇게나 막강하다. 아마 오늘의 모습이 저분의 진짜 자연스러운 모습이겠지. 종일 평상 위 소쿠리에서 햇볕에 반건조된 노란 옥수수. 겉에 버터를 발라 구워보니 어릴 적 문방구에서 군것질하던 ‘논두렁 밭두렁’ 맛이 났다. 콘버터에 모닥불이 빠질 수 없지.
음악이 흐르는 센터 앞마당에 모여 함께 불을 피웠다. 조촐히 둘러앉아 시작되는 '불멍'의 시간. 여름밤, 화로 속 모닥불은 타다닥 타들어가고, 우리의 이야기도 토도독 익어간다.
* 살러(Saler): 남해군 지원으로 <6주 살러, 남해> 프로그램에 참여한 참가자들을 지칭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