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핑은 처음이라/남해 송정솔바람해변 서핑스쿨
날이 가까워질수록 왠지 내키지 않았다. 점점 더워지는 날씨도 맘에 걸리고, 괜히 몸도 무거운 것 같고, 뭔가 귀찮았다. 하지만 다섯 명의 서핑 신청자 중 이런저런 이유로 취소자가 속출하고 결국 단 둘만 남은 상황, 차마 나까지 발을 뺄 수는 없었다. 후딱 끝내고 복귀하자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송정솔바람해변의 <서핑클럽>에 도착했다.
보기만 해도 마음이 착잡해지는 검정 슈트를 낑낑대며 몸에 끼워 입었다. 거울 속에 왠 어리둥절한 물개 한 마리가 서 있다. 외면하고 싶은 마음에 긴 한숨을 쉬며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방문객이 없어 한적한 해변이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강사님을 따라 소나무 그늘이 작게 드리워진 구석으로 향했다. 안전수칙과 기본 동작을 간단히 배웠다. 무더위에 꽉 조인 슈트까지 입고 있으니, 제자리에서 몇 차례 따라 해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찼다. 지금 이 순간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 열 받아 터질 듯한 이 갑갑한 몸뚱이를 바닷물에 담그는 것. 입수하라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둔중한 서핑 보드를 오른팔에 끼고 뜨겁게 달궈진 모래밭 위를 춤추듯 내달렸다.
텀벙! 드디어 바다다. 물이 닿자 열도 식고 몸도 가벼워져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지금부터는 실전이다. 보드 위에 엎드려 파도를 기다리다 강사님의 신호에 맞춰 힘차게 패들링을 하고 신속히 몸을 일으킨다. 절묘한 타이밍과 정확한 업 동작이 성패의 포인트. 엎드린 자세에서 가슴 옆에 두 손을 대고 상체를 완전히 젖히며 일으키는 것, 동시에 재빨리 두 손 사이로 다리를 끌어와 일렬로 기립하는 것이 그것이다. 기립한 후에는 앞다리와 뒷다리 하중을 6:4로 두고, 두 팔을 액션가면 자세로 들어 균형을 잡아야 한다. 처음 한 두 번 물에 빠지고 나니 제대로 감이 왔다. 역시 뭐든지 직접 부딪히고 실패해봐야 비로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언제 조금 유리했었는지, 앞으로 어떻게 고쳐야 할지 깨닫게 마련이다.
등 뒤에 저만치 적당한 파도가 보였다. 힘껏 양손으로 패들링을 하다가, 파도가 보드의 테일에 닿는 순간 재빨리 업 자세로 기립하자, 해변까지 스르륵 단숨에 밀려갔다. 마치 손오공이 근두운에 올라탄 듯, 혹은 치키치키 챠카챠카 초코초코초 '날아라 슈퍼보드' 위에 올라탄 듯 매끄럽게. 파도가 보드를 제 등에 살짝 업고 한껏 높아진 순간, 파도의 앞쪽 경사면을 미끄러져 내려가는 쾌감은 온몸을 짜릿하게 만든다. 날 가로막는 세상의 모든 저항이 사라진 느낌, 날 구속해 온 모든 힘으로부터 해방된 듯 자유로운 기분.
본시 기면 걷고 싶고, 걸으면 뛰고 싶고, 뛰면 날고 싶은 법. 쾌락은 더 큰 쾌락을 또다시 욕망한다. 고작 한 시간 배운 생초보 주제에도 더 높은 파도, 더 거친 바람을 갈망하고 있다. 벌써 마음만은 집채만한 파도에 몸을 내던진 용감한 하와이안 서퍼다. 마치 그 옛날 수학여행 때 고스톱을 처음 배운 날처럼, 운전면허 학원에서 운전대를 처음 잡은 날처럼, 홀딱 빠질 만큼 재미있다. 그 첫 날들 이후 며칠 동안은 자려고 눈만 감으면 화투패와 운전대가 아른거렸는데... 왠지 오늘 밤도 꿈속에서 파도 위를 질주할 것 같다.
때론 낯선 환경이 사람을 더욱 도전하게 만들곤 한다. '그냥 이곳이니까', '지금 안 하면 언제 해봐'라는 마음은 오랫동안 스스로 억눌러온 것들, 자가 검열과 자기 방어의 경계를 해제한다. '수영을 잘 못하니까, 왠지 위험해 보여서, 한국 파도는 별로 재미없을 것 같아서' 하는 마음으로 긴 세월 외면해 온 서핑. 그걸 결국 했다, 이곳에서, 그냥 별 것 없이.
남해라서 오늘도, 내가 스스로 쳐둔 한계를 한 뼘 더 밖으로 밀어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