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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부는 버드나무 Sep 14. 2021

[어슬렁,남해]34.열사의 초상처럼 내맘에 걸린 집게발

남해 상주은모래비치/ 카라반에서 굿모닝/ 아침 해변의 게 잡이

'찬'의 지인이 며칠 전 서울에서 내려왔다. 5인용 카라반을 이끌고 참돔 10마리와 함께. 덕분에 꽃내에서 다 같이 회 파티를 치른 후, 그제부터는 아예 살러* 몇몇이 카라반에 신세를 지며 <상주은모래비치>에 머무는 중이다. 나는 어제 근처 <송정솔바람해변>에서 서핑을 마친 후 점심때 맞춰 잠시 들렀다가, 마침 침대가 한자리 빈다고 하여 하룻밤 머물게 되었다. 


상주은모래비치는 거무튀튀한 몽돌이 많은 남해에서 드물게도 고운 모래가 있는 해변이다. 경사가 완만하고 너그러워서 아이들이 놀기 좋고, 워낙 바람이 넉넉해 파라솔 아래에선 시원하게 낮잠 자고 쉬기에도 딱 좋다. 역시 남해에서 가장 사랑받는 해수욕장이 되기 충분하다.


어제저녁엔 밤하늘을 지붕 삼아, 밤바다를 창문 삼아 야외에 밥상을 차렸었다. 낯선 얼굴도 익숙한 얼굴도 모두 한데 둘러앉은 시간, 미조항에서 공수해온 고등어회와 삼겹살, 매운탕과 소시지 바비큐, 소주 맥주 막걸리 온갖 음식이 펼쳐졌다. 메뉴가 조금 생소해도, 평소 즐기지 않는 술이 곁들여져도 괜찮았다. 아름다운 곳에서는 모든 것이 평소보다 더 관대해지기 마련이니까. 


그 밤, 부드럽게 등을 토닥이다가도 가끔씩 정신 차리라는 듯 맵게 철썩이던 파도소리, 발바닥에서 부드럽게 부서지던 모래알, 흐린 하늘에 수줍게 고개 내미던 엷은 별빛을 오래도록 새겨두고 싶다. 타인의 호의로 누린 우연한 즐거움을 기억하고,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우연한 기쁨을 선물하고 싶어졌다.

평화로운 상주은모래비치 캠핑장의 야경. 바다가 지척이고 편의시설이 잘 갖춰져 있어 여름휴가철엔 인기가 많다. ©문




카라반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에 평소보다 일찍 눈이 뜨였다. 살금살금 조심스레 밖으로 나오니 이미 하늘은 본격적인 여름날을 개시했다. 아직 이른 시각의 텅 빈 아침 해변, 파란 옷을 입은 어린 사내아이가 조그만 바스켓을 들고 해변을 살피고 있다. 게 잡이를 하는 듯한 풍경에 나도 비닐봉지를 집어 들고 따라나섰다. 모래사장 표면 위엔 가느다란 연필을 마구 쑤셨다가 뽑은 듯 작은 구멍이 그득하나, 게들의 움직임은 통 보이지 않는다. 한참 더 전진해 걷다 보니 저 멀리 작은 게들이 바글거리고 있다. 하지만 내가 다가가면 발자국 진동에 놀라 순식간에 게 눈 감추듯 구멍으로 숨어버린다. 게와 나의 소리 없는 눈치 싸움. 열의 아홉은 나의 완벽한 패배이나, 가끔씩 파도 근처에서 도망치다 제 구멍을 찾지 못해 우왕자왕하는 게가 있다면 드디어 내게도 기회가 온 거다. 비닐봉지를 살짝 갖다 대고 몸통을 조심히 집어 올린다. 


엄지 손가락만 한 게들도 직면한 삶의 위기 앞에서 대응이 천차만별이다. 얌체처럼 죽은 척하는 녀석, 바들바들 떨며 어쩔 줄 모르는 녀석, 배를 활짝 치켜들어 덩치를 키우곤 집게를 캉캉거리며 씩씩대는 녀석. 아무래도 가장 안쓰럽고 마음이 흔들리는 녀석은 시퍼렇게 분노한 얼굴로 끝까지 맞서는 마지막 부류이다. 맹렬한 기세로 대드는 녀석을 보고 있자면 내 새끼손톱보다 작은 집게발조차 사뭇 위협적으로 느껴진다. 그야말로 ‘땅콩 같은 킹콩’이다.


이 작은 녀석도 제 생의 난관 앞에서 온 힘으로 저렇게 저항하는데, 하물며 인간은 어떠하겠는가. 결연한 그 눈과 집게발이 마치 어느 열사의 초상처럼 하루 종일 내 마음에 걸렸다. 게 잡이도 함부로 할 일이 아니다.             


이른 아침의 상주은모래비치. 아직 손님이 없는 한적한 바닷가엔 파도소리와 어제를 담은 발자국, 게만 가득하다. ©류


* 살러(Saler): 남해군 지원으로 <6주 살러, 남해> 프로그램에 참여한 참가자들을 지칭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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