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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부는 버드나무 Sep 16. 2021

[어슬렁,남해]36.헤매지 않았다면 널 볼수 없었겠지

남해바래길 4코스 고사리밭길/ 실수로 만난 최고의 노을/ 어쩌다 고두마을

아마도 오늘이 우리 백팩킹팀의 마지막 여행이겠지? <6주 살러, 남해> 프로그램이 막바지에 다다르면서, 그동안 간헐적으로 이어온 우리의 바래길 도보여행도 이제 끝이 다가왔다. 단 한 번 남은 기회라고 생각하니 코스 선정부터 더욱 신중할 수밖에. 결국 장고 끝의 선택은 바래길 4번 코스, 고사리밭길!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창선면 지역이기도 하고, 현지인 몇 분의 강력추천도 있었고, 생전 직접 본 적 없는 고사리밭이라니... 머릿속에 쉽게 그려지지 않는 미지의 풍경이라서 왠지 더욱 끌렸다. 


백팩킹팀의 취지를 살려 마지막 여행은 텐트를 챙겨가기로 했다. 장비 없이 도보 여행하는 우리를 가엾게 여긴 귀촌인께서 경량 텐트 한 채를 빌려주셨다. 출발 준비는 여느 때와 다름없다. 숙소 냉장고와 찬장을 뒤져 바나나, 방울토마토, 두유, 시리얼 등 간식을 왕창 챙긴 후, 밀짚모자와 팔토시를 챙겨 들고 센터를 나선다. 오늘은 일일 멤버로 '다'와 '수'가 동행하기로 했다. 숙박 계획이 없는 그들은 짐이 적은 가뿐한 몸으로 우리의 페이스메이커가 되어줄 예정이다. 


택시로 바래길 시작점까지 이동하는 길, '근'이 바래 앱을 검색하다가 4번 코스 중간에는 매점이나 식당, 화장실 등 편의시설이 전혀 없다는 비보를 전했다. 오 마이 갓! 그럼 물이랑 저녁식사 거리도 사야겠는 걸. 결국 하차 지점을 변경해 창선면 중심가에 내렸다. 일단 하나로마트에 들러 족발, 떡, 그리고 생수 1인당 4병씩을 구매했다. 그런데도 왠지 불안하다. '아무래도 오래 걸으면 곡기도 그리울 것 같아!'. 근처 편의점에 들러 또다시 삼각김밥, 소시지, 에너지바, 구운 계란을 쓸어 담는다. 


'매진 임박' , '여기가 마지막 휴게소', '더는 주유소 없음' 같은 한정적인 문구가 없던 욕구도 곧잘 창조하는 것처럼, '코스 도중에 매점 없음' 이란 안내문구가 우리의 갈증과 허기를 극대화했다. 걱정이 강박으로 변해갈수록 등 뒤의 배낭은 점점 더 부풀었다. 여행길에서 배낭은 언제나 내 불안과 욕망의 크기인데, 오늘도 그 크기가 최고를 경신한다.  


터질듯한 욕망을 등에 짊어지고 바래길 시작점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창선면행정복지센터에서 출발해 동대만간이역과 승마랜드를 지나 저수지에 다다랐다. 긴 방조제 둑길을 따라 걷다 보면 오른편에 갈대가 우거진 습지가 펼쳐진다. 지도의 방향이 마을 어느 주민 댁의 예쁜 집 마당을 가리키더라도 당황하지 말라. 그 마당을 조심히 가로질러 계단을 오르면 수풀이 우거진 오룡방조제로 다시 이어질 테니. 고요한 저수지는 말없이 하늘을 담고, 초록빛 수풀 사이 벌겋게 드러난 황토는 눈부시게 쨍하고, 몸통이 검지 손가락 길이 만한 붉은 도둑게는 스샤샥 잰걸음으로 달아난다. 쉼 없이 바뀌는 풍경들을 탐험가의 마음으로 헤쳐가다 보면 드디어 산행길 입구다. 본격적인 고사리밭이 지금부터 시작된다. 


에둘러가는 법 없이 정상까지 거의 직진으로 올라가는 화끈한 경사로. 오르막 길에선 늘 그랬듯 대화가 사라지고 서로의 거친 숨소리만 남는다. 각자 묵언 수행하는 구도자의 자세로 인생의 오르내리막을 떠올려보기도 하고, 겸허히 등 뒤에 실은 욕망의 무게를 반성하기도 하며 언덕을 오른다. 점점 터질 듯 격해지는 심장 박동에 ‘심폐소생술을 어떻게 했더라?’ 걱정하던 그 순간, 앞선 이들이 갑자기 뒤를 돌아보며 감탄사를 외친다. 


아아... 지상을 빈틈없이 꽉 채운 초록 융단의 고사리밭이라니! 마치 보성 녹차밭을 처음 봤던 때처럼 생경한 시각적 감동이 밀려온다. 여의도 면적과 맞먹는 국내 최대 규모의 고사리 밭이라더니, 과히 고사리 천지다. 정상에서 데굴데굴 굴러도 폭신폭신 부드러울 것 같은 광경. 세상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신비로운 녹음의 바다! 


막 수확철이 끝난 터라 허리까지 웃자란 고사리 잎이 한껏 싱싱하다. 꺾어도 다시 금세 자라나는 고사리는 장마가 오기 전까지 몇 번이고 채취할 수 있는 기특한 식물이다. 주위 마을 일대가 모두 한철 고사리 농사로 일 년을 먹고사는 곳이다 보니 채취 기간인 3월에서 6월까지는 고사리밭길 출입이 통제된다. 이 기간에 바래길 4번 코스를 걷고 싶다면 사전예약을 통해 방문할 수 있다. 그때는 기간 한정 '고사리 비빔밥 도시락' 서비스도 제공된다고 하니, 제철에 맛보는 색다른 즐거움이 있을 것 같다.  


산등성이를 내려와 식포마을을 통과한 후 또다시 산 하나를 오른다. 360도 온 세상의 끝까지 고사리밭으로 뒤덮여 있다. 밭 중간중간 드물게 서 있는 소나무들이 케이크 위의 데코처럼 앙증맞다. 동화 속 요정의 숲 같기도 하고, 천국의 무구한 동산 같기도 하다. 흘린 땀이 하나도 아깝지 않은 절경 앞에서 모두들 가슴이 벅차올랐다. 


온 세상이 고사리밭으로 뒤덮인 환상적인 풍경. 시간가는 줄 모르고 하염없이 그 길을 걸을 수 밖에 없었다. ©성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고사리밭 사잇길을 거닐다 보니 어느새 삼천포 방향으로 해가 뉘엿거린다. 해가 떨어지기 전 하산하려면 서둘러야 하는데, 금빛으로 물들어가는 석양을 보니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정신이 팔려 몇 차례 갈림길을 잘못 들어선 후에야 겨우 고두마을로 향하는 길을 찾았다. 사위는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하고, 네이버 지도에도 표시되지 않는 숲길을 급한 마음으로 헤매다 보니 긴장이 되었던 걸까. 인적 있는 아스팔트 포장도로에 발이 닿으니 그제야 안도의 숨이 나온다. 


삼거리 도로 위에 서서 뒤돌아보니 때마침 다홍빛 석양이 마지막 기염을 토한다. 잘못 든 길에서 우왕좌왕 헤맨 시간이 가장 완벽한 타이밍에 우릴 여기 데려다주었다. 만약 실수가 없었더라면, 매번 바른 길로만 들었더라면, 지금 이 순간의 감동도 만날 수 없었겠지. 방황했던 우리의 불완전함이 새삼 뿌듯해진다. 완벽하지 않은 서로가 더욱 사랑스럽다. 한껏 부푼 행복을 안고, 지는 해를 등지며 마을로 향했다.


가장 적절한 타이밍의 가장 완벽한 노을. 우리가 길을 잘못 들어 헤매지 않았더라면, 지금 여기서 너를 만나지 못했겠지. ©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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