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바람부는 버드나무 Sep 17. 2021

[어슬렁,남해]37.노을과 눈 맞춤해 본 적 있나요?

남해 패러글라이딩 / 망운산에서 만나 황금빛 노을

몇 해 전 엄마가 환갑을 맞았다. 그 해 어느 날, 뜬금없이 본인의 환갑 기념 선물로 두 딸들과 패러글라이딩을 하고 싶다고 하셨다. 온갖 유행과 여론의 발원지인 시골 목욕탕, 그곳 정예 멤버인 아줌마들 사이에 60대의 로망으로 회자되던 참이었나 보다. 엄마와 친구처럼 지내는 제법 사이좋은 자매들이지만, 평소 고소공포증도 심하고 지인들 중 사고를 당한 경우도 있었기에 단번에 거절했었다. "미안하지만 그건 안돼 엄마, 대신 일 년 내내 엄마 환갑 생일로 쳐줄게. 우리 올해는 더 자주 놀자." 


그랬던 내가, 지금 이곳 남해에서, 패러글라이딩을 타다니! 너무 아름다워서 눈물을 흘렸다던 살러* 동료의 간증에 가까운 후기도 있었고, 할당된 체험활동 지원금의 잔액을 소진할 필요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지금 아니면 앞으로 결코 도전하지 않을 것’ 같다는 충동적인 생각이 나를 부추겼다. 남해에 머무는 동안 가급적이면 인생에서 지나칠법한 선택지들을 적극 골라보자는 나와의 다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살러 멤버 여섯 명이 함께 신청한 터라 출발지까지 오는 길은 소풍 떠나듯 설레고 씩씩했다. 그런데 막상 점프 슈트로 갈아입고, 구불대는 비포장 산길을 덜컹대며 달리다 보니 슬슬 실감이 났다. '고도가 꽤 높아진 것 같은데, 대체 어디까지 올라가는 거지? 에이, 설마 꼭대기까지 가는 건 아니겠지?'. 슬픈 예감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다. 트럭은 끝내 망운산 정상에 도착하고서야 멈춰 섰다. 


남해에서 가장 높은 산이라던 망운산, 이름조차도 구름을 바라본다는 뜻의 '望雲'. 남해 군민들이 사랑한다던 그 산에 이렇게 오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사방이 뻥 뚫린 꼭대기에 서서 한 바퀴 돌아보니 서면의 바다노을길부터 여수, 순천, 광양까지 파노라마 풍경이 펼쳐진다. 가장 인기가 많은 골든타임 시간대의 마지막 예약 순서였기에, 때마침 슬슬 넘어가는 해로 바다가 황금빛에 물들어 간다. 


체험 신청서 등록 시 무작위로 부여받은 번호대로 우선 네 명이 호명되었다. 기구를 몸에 장착하고 안전장비를 강사님과 서로 연결한 후 가파른 절벽 위에 선다.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강사님이 가르쳐준 대로, 고개를 들고 정면을 바라본 채 깎아지는 내리막길을 달려가다가 강사님의 신호에 발을 멈추면 몸이 붕 떠오른다.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순식간에 차례대로 날아올랐다. 바람이 너무 세서 열심히 연습했던 발 구르기도 필요 없이 제자리에서 그냥 떠버린 친구들도 있었다. 흩날리는 민들레 홀씨처럼 가볍게 날아가는 그들을 지켜보며, 내 심장도 점점 쿵쾅대기 시작했다. 


친구들은 하나 둘 인간새가 되어 날아가버리고, 베테랑 강사님들은 우리가 쫄지 않도록 서둘러 다음 순서를 호명한다. ©금


선발대로 모두 날아가 버린 강사님들이 다시 트럭을 타고 되돌아올 때까지 나와 '문' 단 둘만 덩그러니 정상에 남았다. 눈앞의 어두운 산 그림자는 더욱 길어지고, 등 뒤의 태양은 점차 가라앉고, 바람소리는 끝도 없이 거세졌다. 이젠 절벽 가까이 다가서기만 해도 바람에 몸이 휘청거렸다. 시각과 청각과 촉각의 완벽한 조화가 두려움을 클라이맥스로 몰아갔다. 더 어두워져도 괜찮을까, 이런 바람에도 안전할까... 기다림이 길어질수록 불안도 점점 커졌다. 시답잖은 농담을 서로 던져봐도 무서운 척을 숨길 수 없다. 결국 둘 사이엔 광폭한 고요만이 흘렀고, 우린 공포와 초조함에 지쳐 땅에 뻗어 버렸다. 


30여분쯤 지났을까. 자포자기 심정으로 드러누워 있는 우리 귀에, 저 멀리 달리는 트럭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반가움에 벌떡 일어났는데, 두려움이 목덜미를 다시 낚아챈다. 복잡한 양가감정에 마음이 갈팡질팡 하려던 찰나, 강사님의 긴박한 지시가 쏟아졌다. 이걸 입어라, 저걸 들어라, 여기 고리를 차라, 한 번 점검하자, 좀 더 앞으로 걸어 나와라, 고개 숙이지 말고 앞을 제대로 봐라, 그래 다 됐다. 겁내지 말고 파이팅! 얼이 빠져버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벼랑 끝에 내가 서 있다. 바람에 몸이 잠시 뒤로 훅 밀리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발이 허공에 떴다. "드디어 비행 시작합니다". 엉겁결에 붕 날아올라 버렸다. 두려움은 솟구치는 아드레날린에 밀려 흩어졌다. 맨몸으로 두둥실 하늘에 떠올라 바람을 타고 앉아 있다니! 너무 환상적인 기분이라 오히려 현실 감각이 사라진다. 어릴 적 하늘을 날던 꿈속처럼 깨고 싶지 않은 순간이다. "으아... 어떻해요... 너무 아름다워요". 너무 감격해서 소리도 지르지 못한 채 그저 이 말만 몇 번이고 되뇌었다. 


바위가 가득한 망운산을 오른쪽으로 크게 반 바퀴 도니, 여수 앞바다에 자몽 빛 석양이 절정이다. 낙하하는 노을과의 눈 맞춤. 매번 땅 위에서 우러러봤던 그를 드디어 당당히 마주 보게 되었다. 이 순간 나는 인간을 초월한 대자연의 일부가 된 것 같다. 녹음이 빽빽한 산도, 검푸른 물결 일렁이는 바다도, 부드러운 곡선으로 나눠진 다랭이 논도, 색색의 지붕이 앙증맞은 집들도 모두 다 내 품 안이다. 하늘을 나는 새들은 매일 이런 기분일까. 속세의 모든 것을 버리고 가뿐하게 승천하는 홀가분함이라니! 


문득 엄마에게 미안해졌다. 이렇게 충만한 감동을 뒤늦게 나혼자 즐기다니. 

엄마, 다음번 생일 때는 우리 꼭 같이 타러 와요. 


패러글라이딩을 마치고 되돌아가는 길, 불타는 노을이 고혹적이다. 오늘 작정하고 우릴 홀리는구나. ©름


* 살러(Saler): 남해군 지원으로 <6주 살러, 남해> 프로그램에 참여한 참가자들을 지칭함


매거진의 이전글 [어슬렁,남해]36.헤매지 않았다면 널 볼수 없었겠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