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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부는 버드나무 Sep 23. 2021

[어슬렁,남해]40.빛나고 아름다운 것들은 대게 그랬어

어제의 저녁놀 오늘의 아침놀 / 백세 할머니의 노래

남해를 떠나야 할 날들이 다가오자, 이곳 풍경을 조금이라도 더 눈에 담아두고픈 마음들이 커졌나 보다. 노을 산책이야 저녁식사 후 습관이 된 지 오래지만, 해돋이는 함께 본 적이 없었는데... 며칠 전부터는 일출 보기가 유행처럼 번졌다. 태양이 유독 부지런해지는 한여름, 4시면 곧 어슴푸레 시작되는 해돋이를 놓치지 않으려고 체력 좋은 이들은 아예 밤을 새우고, 잠 많은 이들은 꼭두새벽 알람을 받고 일어났다. 나도 어제오늘 연달아 그 대열에 동참했다.   


서쪽 하늘의 저녁놀은 찬란한 불꽃놀이 혹은 장작더미 모닥불 같다. 노르스름하고 푸르스름한 빛이 차츰 번지다가, 새빨간 화염으로 활활 타올라 절정에 닿은 후, 회분홍빛으로 희미해져 끝내 검회색 재로 남는다. 반면 동쪽 하늘의 아침놀은 잠자는 암흑 틈 사이로 붉은 자줏빛이 새어 나오다, 새빨간 핏빛으로 번지다, 이내 곧 이글거리는 마그마 색으로 뒤덮였다가, 희미한 연분홍빛에서 결국 투명한 황금빛으로 온 세상을 가득 채운다. 


어제저녁 낙하하는 태양을 배웅하고, 오늘 새벽 다시 떠오르는 해를 마중했다. 마치 어젯밤 아쉽게 인사하고 들여보낸 연인이 너무나 보고파, 이른 아침부터 그 집 앞을 서성이는 기분. 내 인생에 다신 없을 것 같은, 참 부지런히도 사랑한 반나절이다.




태양이 본격적인 제 일과를 시작할 때 나는 다시 잠이 들었다. 불타는 그리움과 뜨거운 데이트는 이제 내겐 무리인가 보다. 아쉬움 없이 숙면을 취한 후 점심때가 훌쩍 지나 일어났다. 게으름도 배고픔을 이기긴 어렵다. 결국 주방으로 느릿느릿 내려갔다. 애매한 시간이라선지 주방도 식당도 텅 비어 있다. 토마토와 계란을 휘리릭 볶아 밥을 먹고 있자니, 부지런한 '근'이 산책을 갔다 들어온다. 


잠시 마주 앉아 안부를 묻다, 프로젝트를 위해 며칠 전 백세 할머니와 인터뷰하고 노래를 녹음했다는 얘길 들었다. 소감이 어땠는지 물으니 그저 할머니의 말 한마디, 동작 하나하나, 모든 것이 다 감동이었단다. 도무지 그 이유가 무엇일까 스스로도 궁금해질 만큼. 특별한 인생을 산 것도, 위대한 업적을 남긴 것도 아닌데 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할까. 그건 어쩌면 한 세기를 견디고 살아남은 생명에 대한 본능적인 경외가 아닐까. 숱한 삶의 고비를 모두 참고 관통한 채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에 대한 감사와 존경이 아닐까. 


돌이켜보면 마을 입구마다 버티고 서 있는 보호수도, 여전히 유효한 원시적 방식의 죽방렴도, 흔적만 남은 성터도, 이끼 낀 낡은 돌담도, 몽돌 해변의 마모된 돌멩이도... 남해에서 빛나고 아름다운 것들은 대게 그러했다. 오래되고 닳았지만 여전히 존재하고, 오늘도 또 하루 성실히 나이를 먹어가는 그런 것들. 그것들이 묵묵히 견뎌낸 시간들이 그냥 위로처럼 다가오는 날들이 있었다. 


닿고 싶은 곳에 다다르지 못했더라도, 이루고픈 것을 손에 쥐지 못했더라도 어떠하랴. 그저 오늘도 하루를 버티며 생을 전진했다는 것 그것이면 충분하다고, 괜찮다고 수고했다고, 서로의 어깨를 다독여주고 싶다.  


               

처연하게 번지는 핏빛 아침놀. 새로운 하루가 탄생한다는 건 이렇게나 슬프고 고요하고 아름다운 일인가. ©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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