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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부는 버드나무 Sep 22. 2021

[어슬렁,남해]39.헤어지기 아쉬워 벌써 미리 그리웠다

남해 지족구거리고별 투어 / 미지근한송별파티

'채'와 함께 지족 구거리에 나갔다. 마지막으로 <공동작업장>과 <초록스토어>를 한 번 더 둘러보고, 조용한 카페에서 묵은 마음과 일기를 정리하고 싶었다. 오랜만에 방문한 가게들은 감사하게도 우릴 기억해 주었다. 기억하고픈 남해 풍경이 담긴 엽서를 샀더니 한 곳은 "그냥 제 작은 선물이예요"라며 덤으로 한 장을 더 골라 주시고, 다른 한 곳은 빙긋 웃으며 볼펜 한 자루를 더 담아 주셨다. 언젠가 남해에 다시 돌아온다면 꼭 들르겠다고 인사하며, 부디 그때까지 오래도록 이곳에 머물러 달라고 당부드렸다. 


카페로 향하는 길목에서는 '채'와 헤어졌다. 각자 마음을 정리하고픈 마지막 장소가 달랐기 때문이다. 존중해야 마땅한 순간이기에, 되돌아갈 시각과 만날 장소를 합의한 채 웃으며 돌아섰다. 나는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낯선 카페로 향했다. <카페 샘성>, 창선교가 바라보이는 동네 사랑방 같은 분위기였다. 반가운 커피를 오랜만에 앞에 두고 한창 밀린 일기를 쓰다가, 문득 '문'이 요청한 소감문 작성 건이 기억났다. 남해에서 함께 걸었던 '일몰 개고생 백패킹팀'의 여행기를 가이드북 형식의 소책자로 만드려는데, 마지막 페이지에 멤버별로 간단한 소감을 싣고 싶다고 했다. 일기는 잠시 덮어두고, 우선 약속부터 지켜야지. 


이것은 나의 수줍은 고백이다.
 
내가 여전히 남해를 사랑한다고 말한다면,
그 8할은 그대들과 함께한 바래길 위의 추억 덕분일 것이다. 

느리다고 답답해하지 않고, 힘이 부친다고 귀찮아하지 않고,
각자의 속도대로 앞서 걷다가도 가끔씩 뒤돌아보며 기다려 준 당신들의 등이, 
언제나 고맙고 든든했다. 

고생스러운 여행의 강렬한 여운과 우연이 주는 희열을 사랑했던
우리의 뜨거운 여름,
 길 위의 그 낮과 밤을 소중히 접어뒀다가
마음 헛헛한 날 가끔씩 펼쳐보리라.



고민할 새도 없이 술술 쉽게 쓰인 소감문, 그런데 그 짧은 문장들이 나를 울릴 줄 몰랐다. 내 눈에서 벅차오르는 눈물이 너무나 당혹스러웠다. 누가 볼까 부끄러워 서둘러 화장실로 도망쳤다. 함께한 시간들 속에서 얼마나 많이 배려받았는지, 얼마나 많이 의지했었는지 뒤늦게 깨닫는 순간, 뜨거운 감정이 내 안에서 터져버렸다. 어쩌면 내 인생에 다시없을 정답고 고운 시간들임을 알아채 버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떡하나... 다가올 헤어짐이 너무 아쉬워, 벌써부터 미리 그리워졌다.   


길 위의 그 모든 낮과 밤을 소중히 접어뒀다가, 마음 헛헛할 때 가끔씩 꺼내보리라.




그 밤 우리의 송별 파티는 의외로 미지근했다. 프로그램 공식 종료일자에 맞춰 바로 떠나는 이는 '금'과 '한' 단 둘뿐, 나머지 9명은 사비를 내고서라도 꽃내에 좀 더 머물다 갈 예정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딱 두 밤만 더 자고 가기로 했다. 떠나가는 친구들을 모두 잘 배웅해준 후, 나는 뒤늦게 홀로 조금은 고독하게 떠나고 싶었다. 각자 손 흔들고 한꺼번에 흩어지는 대대적인 이별식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헤어지는 것이 너무 실감 날까 봐, 혹시 주책맞게 눈물 흘릴까 봐 두려웠다. 이렇게 다들 함께 남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누구든 어떤 핑계로든지 남해에 더 머물고 싶은 마음이었나 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지금 느끼는 섭섭함의 속도도 무게도 각자 다를 수밖에. 결국 분위기는 송별인 듯 송별 아닌 듯, 묘하게 나른했다. 운영진이 직접 삼천포까지 가서 공수해 온 각종 회와 피자, 치킨 등 속세의 음식이 한상 가득 차려졌건만, 되려 풍족한 여느 회식 날의 풍경 같았다. 게임도 해보고, 자리를 옮겨가며 수다를 이어봐도, 뭔가 어색했다. 결국 시간을 달려 파장한 뒤에도 애매한 아쉬움이 남아, 끼리끼리 휴게실 노래방으로 센터 앞마당으로 흩어졌다. 제대로 정리해 떠나보내지 못한 이 마음들, 왠지 뒤늦게 불쑥 덮쳐올 것만 같아 불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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