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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부는 버드나무 Aug 06. 2021

[어슬렁,남해] 03. 날카로운 첫 패들보트의 추억

남해 유스타운 앞바다/ 해양레포츠 체험

오늘 아침엔 어제 산책한 경로의 반대방향, 즉 센터의 오른편 개울길을 거슬러 올라갔다. 어제 종일 내린 비로 수량이 불어나 소리가 제법 묵직하고 힘차다. 개울물은 쉼 없이 돌아가는 방직기에서 뽑혀 나온 투명 실크처럼,  빠르고 부드럽게 바다를 향해 흘러들어 간다. 길가의 잔풀들은 밤비에 흠뻑 취해 촉촉이 젖은 숨을 내쉰다. 냇가 너머 병풍처럼 둘러쳐진 산에는 수령이 오랜 나무들이 빽빽하다. 어느 산골 깊은 숲에 들어온 것 마냥 그윽하다. 바다로 향하던 산책길과는 사뭇 다른 풍경에 마음이 신선해진다.


아주 오랜만에 오기가 생겼다. 바로 패들보트 때문이다. 몇 해 전 아이슬란드에서 패들보트를 처음 봤었다. ‘어부의 날(Fishermen's day)’ 기념으로 온 나라의 배가 정박한 날, 바다 위에서 청년들의 패들보트 시연 행사가 있었다. 나뭇잎에 사뿐히 올라 탄 신선들 마냥 유유자적 평온해 보였다. 그때부터 막연하게 언젠가 꼭 해보고픈 목록에 올려뒀는데,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다. 


처음엔 패들보트 위에 바로 서지도 못한 채 곧장 물속으로 고꾸라졌다. 보던 것보다 생각한 것보다 균형 잡기가 어려워서 당황했지만 이내 고집이 생겼다. 지금 포기하면 패들보트는 영영 내 인생에서 ‘못 타는 것/ 노잼’으로 분류 폐기될 것 같았다. 무릎이 쓸려 멍들고 열 번 넘게 내동댕이 쳐진 몸은 천근만근이지만, 자동 반복 재생되는 영상처럼 또다시 패들보트로 위로 기어오르는 나를 발견했다. 젠장, 내 안의 미친 오기가 발동해버렸나 보다.


끝내 나는 바다 위 패들보트에서 일어섰고, 노를 저어 전진했다. 상상처럼 근사하고 여유로운 자세는 아니었으나, 바다 위를 잠시 걷는 듯한 경이로움을 맛봤다. 푸른 멍, 보랏빛 입술, 그리고 가슴속 나만의 작은 성취감, 오늘의 바다가 내게 남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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