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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부는 버드나무 Aug 10. 2021

[어슬렁,남해] 04. 꼴찌가 참 잘 어울려

명랑 운동회

"땀나지 않을 것, 웃음을 줄 것, 게임 룰이 간단할 것"

오늘 열린 명랑운동회의 규칙이다.


총 12명의 참가자들이 1라운드에서는 4팀, 2라운드에서는 3팀, 3라운드에서는 2팀으로 나눠져, 각 라운드가 종료될 때마다 팀을 점차 병합해가며 겨루는 방식이었다. 


종목은 운영진이 준비한 게임과 참가자들이 즉석 제안한 게임들로 구성되었다. 

그리하여 엄선된 공식 종목은 전주 듣고 노래 맞추기, 병뚜껑 알까기, 초성게임, 절대음감, 속담 캐치마인드, 눈 가리고 아웅, 파이프 라인!


'이 더위에 무슨 운동회냐' 싶어 시큰둥했는데, 막상 게임이 시작되고 나자 나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고 "정답!"을 외치기 바빴다. 에어컨 윙윙 도는 실내인데도 손바닥에 땀이 배고, 너무 집중한 탓에 막판엔 머리까지 지끈거렸다. 이게 뭐라고. 누군가 적절히 판만 깔아준다면, 사람들은 생각보다 훨씬, 열심히, 신나게, 잘 논다.  


매 경기마다 만년 2등 팀이었던 우리는, 팀원 모두 끝까지 최선을 다했으나 결국 종합 꼴찌였다. 첫 라운드에서 노래 맞추기를 잘해준 '찬', 두 번째 라운드에서 속담 캐치마인드를 빛내준 '문'에게 미안했다. 경쟁이 싫다던 '문'은 점점 열기를 더해가는 팀들의 승부욕과 끝없이 이어지는 게임들을 버거워했다. 그조차도 사랑스러웠다. 늘 차분한 '찬'은 연이은 패배에도 매번 괜찮다며 씩 웃었다. 중간에 합류한 '근'은 시합 전엔 꽤나 진지하고 열정적이지만 승부가 나면 결과에 연연치 않는 쿨한 성격이라 좋았다. 마지막에 힘을 합쳐준 '금'과 '채'는 그동안 우리 팀에 없었던 불타는 승부욕으로 열띤 막판 분위기를 만들어줬다. 


각 라운드별로 승리한 팀은 경품 추첨 박스에 팀원들의 이름을 한 장씩 더 넣어 추첨 확률을 높였다. 경품은 남해군 내 어디든 1회 무료 픽업/픽드롭 이용권, 동네 슈퍼 3만 원 이용권, 일요일 하루 왕 권한 부여권. 

경품 추첨에 기적은 없었다. 확률은 여지없이 들어맞아 종합 1등 팀의 팀원들이 사이좋게 경품을 받아갔다. 


꼴찌였던 우리 팀은 모든 것이 종료되었음에 그저 기뻐하며 열심히 박수를 쳤다. 누군가 우리 팀원을 보며 왠지 꼴찌가 참 잘 어울린다고 했다. 꼴찌라도 개의치 않고 홀가분하게 웃고 있는 모습이 오히려 멋지다고,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자기가 꼴찌가 될 걸 부럽다고.  


승리한 자는 진심으로 축하해주고, 패배한 자도 결코 상심하지 않는, 웃기고 명랑한 운동회. 

사는 게 오늘 같기만 하다면 매일 지면서 살아도 좋을 텐데.


"꼴찌가 잘 어울린다"는 말도 왠지 매력처럼 들리는, 그런 사람들과 함께, 

지금 나는 남해에 있다.



운동회 점심식사로 준비했으나, 결국 싸면서 다 먹어버린 비운의 김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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