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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렇구나 Jul 23. 2020

고집을 버려

M형 사회에서 월급쟁이 살아남기


4년 차 월급쟁이 딸과 어젯밤 한 판 붙었다. 말이 그렇지, 쌓이고 쌓여 폭발한 쪽은 나였고 딸은 듣기만 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 그랬는지, 내가 왈왈 짖을 때 속으로 노래를 부르느라 못 들어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근거 없이 하는 말이 아니다.


언젠가 실컷 잔소리를 해도 조용하길래 문득 미안해진 경험이 있다. 너무 심했나 싶어 되레 사과를 했더니 그제야  한다는 말.

엄마, 괜찮아, 엄마가 무슨 말 하든 나, 어차피 엄마 말 안 들. 노래 부르거든.

그랬던 딸이기에 한 말이다.


다 큰 자식들 속에서 엄마 아닌, 하숙집 아줌마처럼 살기로 작정한 후 지속되어  밀월은 어젯밤으로 끝났다. 넉 달만이었다.


딸애는 말수가 적고, 1년 차 월급쟁이 남동생보다 순하긴 해도 고집은 더 세다. 남편이 최 씨라서 딸 아들도 모두 최 씨인 게 내 불행의 시작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반면 나는 팔랑귀인 편이다. 남이 잔소리할 빌미를 주기 싫어서라도 내가 뭔가 잘못했다 싶을 땐 나를 얼른 바꿔버린다. 남에게 지적질받는 게 너무 싫으니까 지적질할 기회를 원천 봉쇄하는 이치. 하지만 우리 집 세 최 씨는 '안강최'가 아니라 '최안강'이 맞지 않나 싶게 다들 '한 고집' 한다.


월급날마다 적금 드는 셈치고 우량주 10%만 꾸준히 사 모으라고, 30년쯤 연금으로 여기고 묻어두라고  딸에게 몇 번을 얘기했을까.

은행 금리가 바닥이 되면서 판매 종료된 은행 연금신탁 상품에 계속 맡겨둔 개인연금 천만 원을 증권회사로 '옮기자'라고 몇 번을 말했을까.


그때마다 대답은 잘했다.

응, 알았어. 응, 내가 알아서 할게. 알았다고. 내가 알아서 한다고.


알아서 하긴 개뿔. 딸애는 결코 알아서 하지 않았다. 알아서 할 생각은 꿈에도 없는 채로 그새 1년을 넘겨버렸다. 삼성전자 우선주가 3만 원 대이던 지난 3월에 왕창 샀어야 다는, 개 풀 뜯어먹는 소리나 할 줄 알았지….


제발이지 나는, 다들 85세까지만 살다가 죽는 법이 만들어지면 좋겠다. 이렇게 좋은 세상에 백 살도 넘기고 더 오래오래 살고 싶은 분은 무슨 재수 없는 소리냐, 눈을 희번덕이며 타박할지라도.


내가 무슨 특별한 '이즘'을 신봉해서는 아니다. 코뮤니스트거나 아나키스트거나 니힐리스트거나… 나는 그딴 거 아무것도 모른다. 그냥 내 새끼 남의 새끼 할 것 없이 걔네 미래를 생각하면 짠해서 그런다.


<리부트>를 쓴 유명 강사 김미경 씨처럼 '코로나 이전 세상으로 돌아갈 일은 없을 텐데, 아이고 울 아그들 만날 마스크 끼고 다니고, 불쌍해서 워쩐데요' 그저 그런 마음에서다.


왜 85세냐고? 나야 80세에 죽어도 상관없지만 왠지 80세까지 못 박는 건 좀 짧은 것 같고 90세는 무리다 싶었다. 그러니 요새 뚝딱뚝딱 법령 잘 만드는 국회에서 85세 이상으로 살면 안 된다는 법을 만들어 주면 어떨까. 그럼, 젊은이들이며 막 태어난 아기들이 노령 연금 때문에 세금 갖다 바치느라 허리가 휠 일이 줄어들 텐데.


국민연금도 언제 바닥날지 모른다고들 하는데, 월급날마다 따박따박 연금공단으로 피 같은 돈이 흘러 들어가는 것을 무력하게, 꺼림칙해하며 바라볼 일도 줄어들 테고.


과거를 회상하면 후회뿐이고 미래를 떠올리면 불안뿐이란 말. 나도 들어서 안다. 그날그날 현재만 바라보며 최선을 다하는 게 정신건강에 좋다는 것도 안다.


좀 더 살았다고 꼰대처럼 조언하지 말고 공감만 해주라는 것, 내 화두다. 남을 바꾸려 말고 내가 먼저 바뀌면 온 세상이 바뀌게 돼 있다는 마르셀 프스트의 명언 역시 내가 자주 써먹는 말이다.


그런데 이건, 

우리가 다 죽고 없는 훗날, 자식의 노후가 달린 연금 문제 아닌가. 언제쯤 집을 살지 모르지만 그런 목돈을 어떻게 몇십 년씩이나 묶어 놓느냐는 마인드로 살고 있는 딸을 그래, 엄마란 사람이 가만 냅두고 봐야만 하고?


딸에게 인상을 찌푸리고 싫은 소리를 했으니 잠은 다 잤다 싶었다. 어차피 뒤척거릴 거면 일어나 책을 읽는 게 나았다.


<20배 경제학>? 첨 보는 책이었다. 집에 책이 많은 편도 아닌데 요새 자꾸 못 보던 책을 발견한다. 책 안쪽 면지를 들춰 보니 남편의 여직원이 2013년에 선물한 걸로 돼 있다.


이 책도 책장에 꽂힌 채 언제쯤 내가 자기를 들춰봐 주려나 기다렸겠군 싶으니 아이를 나무랄 일만도 아니다 싶었다. 모든 것엔 때가 있다는 말은 엄연한 진리이니까.


원제는 <M형 시대의 진정한 부자가 되는 법>이란 책이란다. 대만 경영대를 졸업하고 경영 컨설턴트로 일한 장징푸 님이 쓴 책을 2010년에 도서 출판 예문에서 <20배 경제학>이란 제목으로 발간한 거였다.


M형 시대란 일본 경제학자 오마에 겐이치가 제시한 개념. 허리에 해당되는 중산층은 점점 줄어들고 양극단만이 두드러져서 M자 모양이 되는 걸 의미했다.


국가나 사회는 전체 국민을 안전하게 보장해주지 못하므로 마냥 손놓고 기다리지 말라고, 그러려면 장기적이고 지속적이고 다층적인 수입원을 확보해야 한단 내용이 눈길을 끌었다.


그러니까 월급에만 매달리는 월급쟁이로 살지 말고 임대료, 특허, 주식, 인세, 권리금 등을 수입을 창출해야 한다는 일침.


멀쩡하게 부지런히 일하는 월급쟁이들이 무슨 죄이길래. 그럼에도 그들이 양극화 시대의 희생양이 되는 이유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사회적 원인도 있지만 그중에서도 반드시 성공하는 사람이 있는 걸 고려해 보면 개인적인 사고와 행동방식의 문제도 결코 무시할 수 없다'라고. 내 말이!


어차피 다 읽고 잠들 순 없겠어서 휘리릭 책장을 넘겼다. 세상에, P.141 중간쯤 적힌 소제목이 '고집을 버려라'인 게  눈에 팍 꽂혔다.


그럼 그렇지. 이거야말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이 고집쟁이들아!

난 맘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얼른 읽기 시작했다.


… 당신이 왜 인생 역전에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는지 아는가? 바로 고집 때문이다! 대다수의 경우 고집은 사실 내면의 공포에서 기인된 것이기 쉽다. 고집이 센 이들은 손 안에 가진 것을 잃을 것 같은 두려움 때문에 기회를 포착해도 어떠한 변화나 전환점을 마련하지 못한다. 결국 코 앞까지 왔던 기회는 조용히 사라져 버린다.…<중략>…


…한 남자 아이의 손에 사탕 단지가 들려 있었는데, 아무리 애를 써도 단지 안에 넣은 손을 빼낼 수가 없었다. 조급해진 엄마가 단지를 잡고 바닥에 쳐서 깨뜨렸다. 안에 든 사탕은 깨진 유리조각과 섞여 더 이상 먹을 수 없게 되었다. 아이의 손에 사탕 한 움큼이 들려 있었기 때문에 손을 단지에서 뺄 수 없었던 것이다. M형 빈자는 위의 남자 아이와 다를 바 없다. 사탕을 위해 고집스럽게 주먹을 펴지 않기 때문에 자신을 곤경에 빠뜨리고, 그 곤경에서 헤어나질 못한다. 그 결과 단지를 깨뜨리고, 심지어 한 움큼의 사탕 때문에 더 많고 더 맛있는 사탕을 버리게 된다.…


딸애를 반박하기 글을 찾아내

거봐라, 하고 싶었던 건 잠시.  

마음이 싸하니 가라앉았다. 주말도 없, 휴가 갔을 때조차 일 걱정을 떨쳐버릴 수 없는 채로  힘들게 번 돈인 걸 모르지 않기 때문이었다. 한 푼도 잃기 싫은 그 마음을 나라고 왜 모를까. 지금이니까 말이지, 나 역시도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원금 보장'파였다.


차이가 있다면, 과거의 잘못된 선택에서 교훈을 얻는 순간 나는 얼른 방향키를 돌리려 애쓴다는 것. 그건 내가 똑똑해서가 아니고 세 최 씨보다 고집이 덜 세기 때문이란 것.


그만 잘까 하는데, 딸아이도 침대에서 뒤척이긴 마찬가지였는지, 전화기가 윙 울리며 톡이 들어왔다.


「엄마 말대로 내일 주식 살게.」


M형 시대에서 월급쟁이로 살아 남기, 더 나아가 경제적 시간적 자유를 누리려면, 앞으로 엄청 달라져야만 할 거라고 답장을 보내려다 관뒀다. 그보다 진짜 고 싶은 말,

'너, 앞으로도 안 바뀌면 땡전 한 푼 없을 줄 알아!'라고 내 손가락이 마구 써대면 어쩌나 싶어서였다.

 

주식을 산다고 능사는 아니지만, 금융 마인드를 조금씩 익혀나가고 투자에 대한 감을 기르기를 바라는 나에게 부디 그 누구도 재 뿌리지 말아 주시길. 주식 그거 아무도 몰라, 라는 뻔하디 뻔한 말로 초치지 마시길. 주식이 신의 영역인 건 나도 알고 있으니까.


1년 동안 이제나저제나 주식을 샀다는 톡이 딸에게서 올까, 연금 펀드로 갈아탔다는 소식은 또 언제쯤? 하며 기다려왔던 날들. 그러면서도 다 큰 자식 눈치 보느라 할 말을 참고 참았던 순간을 떠올리자 잠이 저만치 달아나는 것 같았다. 하숙집 아줌마 모드에서 엄마로 다시 돌변한 게 과연 잘한 건지 확신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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