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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인같은 남자 Jan 21. 2024

5. 런던에서 첫날밤

두근두근 설레임

드디어 장시간의 비행을 마치고 런던에 첫 발을 내디뎠다.

새벽녘의 공항은 한낮의 공항과는 또 다르게 조용하고 조금은 한적해진 느낌을 주었다.

비행기에서 내려 출입국 심사하러 가는 길에 보이는 광고판을 바라보며 내가 정말 영국에 도착했구나, 낯선 땅에서 삶이 이제 시작되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난생처음 들어보는 영국 기업들의 광고들을 뒤로하고 걷다 보니 출입국 심사를 기다리는 줄에 서있게 되었다.

영국인과 EU국가의 국민들은 별도의 라인이 있었다.(당시에는 브렉시트 하지 않은 상태였다.)

나는 그 외 국가 라인에서 내 순서를 기다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한국에서는 이 정도까지 많이 보이지 않았었는데 어느새 내 주변에는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로 가득했다.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큰 소음 없이 조용히 서서 다들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내 차례가 되었다.

무엇을 물어볼지, 내가 잘 알아듣고 대답할 수 있을까 하는 온갖 걱정을 하며 침을 꼴깍 삼키고선 출입국 심사원 앞에 섰다. 그리고 긴장된 말투로 한마디 던지며 수줍은 아이 마냥 여권을 건넸다.

"H.. Hello..?"

돌아오는 건 냉담하기 그지없는 심사원의 눈빛과 무뚝뚝한 물음이었다.

"What is the purpose of your visit?"

"S.. Study."

관광이라고 해야 편하게 지나갈 텐데.. 공부하러 왔는데 공부하러 왔다고 해야지 뭐라고 하겠는가. 하지만 역시나 관광하러 온 게 아니기에 질문이 길어진다.

무슨 공부를 하러 온 거냐.. 얼마나 체류할 거냐.. 영어를 배우러 왔다는데 어느 학원에서 배우느냐.. 거주지는 어디냐.. 등등... 

태어나 처음으로 실황으로 듣는 영국식 발음의 영어 듣기 평가로 중간중간 한국의 주입식 교육으로 열심히 배웠던 Excuse me? 와 Pardon?을 외치며 더듬더듬 대답하고 나니 여권에 도장을 쾅하고 찍어주었다.

못 알아듣고 대답 못하면 입국 못할까 봐 걱정하며 수능 볼 때 영어 듣기 방송에 집중했던 것보다도 더 집중해서 들었던 것 같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영어 공부 좀 더 열심히 하고 올걸 하는 후회도 조금 들었고...

영국으로 들어가기 위한 하나의 관문을 통과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졌다.

짐 찾는 곳에서 캐리어를 찾은 후 밖으로 이동하는 사람들을 따라 이동하기 시작했다 굳게 닫혀있던 자동문이 열리자 정말 다양한 인종의 여러 사람들이 저마다 찾는 사람의 이름이 써진 다양한 물품들을 들고 서있었다. 잠시동안 머릿속이 정지한 것 마냥 '여긴 어디, 나는 누가?'라는 생각으로 멍하니 있다가 정신 차리고 내 이름이 써진 것을 들고 있는 사람이 있는지를 한참을 살펴보았다.


학교에서 그렇게 수도 없이 보고 듣고 공부했던 영어였지만, 당장 실제 생활 속에 던져지 고나니 정신이 없어서인지 내 이름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얼마나 두리번거렸을까 앞서 마중 나온 사람들과 만나서 사람들이 빠져나가고 난 뒤 한산해지고 나서야 내 이름이 써진 종이를 들고 서있는 사람을 발견했다.

멀끔한 정장차림으로 마중 나온 흑인분이 서 계셨다.(여기서 흑인이니 백인이니 하는 것은 인종차별이라기보다는 당시 다양한 유색인종을 처음 만났던 것에 대한 느낌을 살려보고자 표현하는 바이니 오해 없길 바란다.)

그분은 내가 맞는지 한번 더 확인하고는 웃으며 육중한 무게의 내 캐리어를 끌고 주차장에 차가 주차되어 있다며 따라오라고 하고선 먼저 앞서 가기 시작했다. 도착한 곳에서 짐을 차에 싣고 올라타자 천천히 차는 출발했다. 그렇게 출발한 차는 히드로 공항을 빠져나가 새벽의 런던 시내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자정을 넘긴 새벽의 런던은 일부 건물과 지나는 차량들 그리고 가로등의 불빛들만이 일렁이고 있을 뿐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영국이란 나라는 책과 미디어를 통해 접하긴 했지만, 당시 나에게 서양국가에 대한 이미지는 미국 영화를 기반으로 이미지가 각인되어 있던 터였던지라 유럽의 섬나라 건물들과 보이는 모습들은 기존에 내가 가지고 있던 서양국가는 이런 이미지겠구나 했던 것이 오판이었다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건물들은 하나같이 옹기종이 모여있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빽빽하니 붙어있었고, 언제 지어진 것인지 궁금할 정도로 오래된 외관들이었다. 그렇게 창밖을 두리번거리며 보고 있을 때, 운전기사가 지루했던 것인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의 질문은 그리 어려운 질문은 아니었기에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와 나의 대화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이유는.. 그가 내가 말하는 영어 발음을 잘 알아듣지 못했었다.  분명 질문한 내용은 어렵지 않았다.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 런던에는 왜 왔느냐, 얼마나 머물 계획이냐 등등 정말 단순한 질문이었는데 내가 답변을 하면 못 알아 들었는지 다른 이야기를 하곤 했었다. 그때 나름 영어 발음은 원어민 수준은 아니더라도 괜찮다고 생각해 왔던 자신감에 상처를 입게 되었었다.


공항에서 출발한 지 1시간 정도가 지났을 즈음, 화려해 보이던 건물들이 있던 곳을 벗어나 한적한 주택가처럼 보이는 곳으로 차량이 진입하기 시작했다. 솔직히 이때 살짝 긴장하기도 했었지만 그 긴장은 단순히 영화를 많이 봤던 나 자신의 상상으로 인한 일이었을 뿐 아무 문제 없이 당분간 머물게 될 홈스테이 하우스에 도착했다. 택시 기사는 트렁크에서 캐리어와 내 짐을 홈스테이 하우스 집 앞에 내려주고는 정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쿨하게 돌아갔다. 문에 있는 벨을 누르기 전까지 이 런던 한복판의 고요한 주택가 거리에 나 혼자 덩그러니 서있었다. 심호흡을 하고 문에 달린 벨을 눌렀다.

누가 나올까. 홈스테이 주인 분은 어떤 분일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지금 생각하면 상당히 편협한 생각을 했었는데, 그것은  영국을 단순히 백인들이 많이 사는 나라라고 생각했었다. 그렇기에 당연히 집주인도 백인이겠거니 나도 모르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문이 열리고 문 앞에 서있던 사람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정말이지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흑인 할머니셨는데 기골이 장대하신 분이셨다. 머릿속이 또 한 번 멈춘 것 마냥 멍하니 있다가 황급히 인사를 하자 너무도 환하고 인자하신 미소로 반겨주셨다.

영국 런던에서 첫 밤, 첫 방에서(홈스테이 2010)


할머니께서는 피곤하진 않느냐, 장시간동안 비행기 타고 오느라 고생 많았다, 배고프면 음식을 준비해 주겠다 등등 정말이지 너무도 친절하게 이야기해 주셨고, 나는 괜찮다고 감사하다고 이야기했었다. 

홈스테이 하우스는 2층 주택이었는데, 1층은 응접실과 주방 겸 식당, 다용도실 그리고 현관이었고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올라가다 보면 방이 하나 있었고 그 옆으로 화장실, 조금 더 올라가면 방이 2개가 있었다. 제일 안쪽 방은 할머니께서 쓰시는 방이었고, 나는 할머니께서 쓰시는 방을 들어가기 전에 있는 방을 배정받았다.

내가 올 것을 대비해서 침구도 새로 준비해 뒀다고 이야기하시며, 피곤할 텐데 어서 자라고 중요한 이야기는 내일 아침 먹으면서 하자고 하곤 나가셨다.


파란색 벽과 서랍장, 그리고 침대보.. 그 특유의 냄새..

지금도 런던에서 첫 밤이자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던 그 방의 모습은 눈을 감아도 떠오르고, 그때의 그 기분은 시간이 오래 지났지만 여전히 생생하다. 그렇게 런던에서 나의 밤은 지나가고 있었다.

런던에서 나의 첫 방(홈스테이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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