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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인같은 남자 Jan 17. 2024

4. 안녕 한국, Hello UK

잠시만 안녕, 그리고 새로운 도전

정리해야 하는 일들을 하나 둘 마무리하면서 필요한 것들을 준비하는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어느덧 출국일이 코 앞으로 다가왔다.

돌아오지 않는 것도 아니었지만 이제 내일 출국하게 되면 무슨 일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1년이란 기간 동안은 돌아올 수가 없었기에 출국하기 전날 밤은 잠들기 어려운 밤이었다.

설렘과 두려움이 공존하는 그런 기분

부모님께서는 준비해야 하는 것들은 잘 준비했는지, 가서 적응 잘하고 해야 된다는 이야기를 해주셨고 출국일 당일 공항까지 오시겠다는 것을 안 오셔도 괜찮다고 말씀드렸다.

어디 이민을 가는 것도 아닌데, 굳이 공항까지 마중나오시라고 하는 게 좀 죄송스럽기도 했고 조용히 생각을 정리하면서 출발해야겠다는 생각에 혼자서 가기로 결정했다.


출국하기 전날 밤

오랜만에 본가의 내 방 침대에 누워있자니 참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복잡 미묘한 감정과 책과 영상 매체로만 접하고 들어온 영국이라는 나라에 내가 짧다면 짧은 기간이지만 그 나라 사람들과 뒤섞여 살아보는 경험을 하게 된다니...

내가 영국이라는 나라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고는 책과 미디어를 통해 접한 정보가 전부인데, 생소할 수 있는 문화에 잘 적응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 이왕 가는 어학연수인데 가능한 한 영어 실력이 많이 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그러면서도 기존의 여행과는 달리 시간적인 여유가 있을 테니 간 김에 유럽 여행도 하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다양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고, 그 생각들로 인해 잠 못 이루는 밤이 되었다.


그렇게 꼴딱 밤을 새우고 어느새 출국하는 날 아침 해는 떠오르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한 아침이었지만, 살짝 고취된 흥분감 때문인지 피곤함은 느끼지 못했다.

앞으로 이어질 장시간의 비행에서 제대로 씻지 못할 것을 감안하여 샤워를 하고 나오니 조금 전 살짝 몽롱했던 머릿속이 상쾌하게 맑아진 기분이 들었다.

샤워를 마치고 방으로 들어가는 길에 주방을 보니 어머니께서는 평소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계셨었다.

불고기, 계란말이, 꽃게탕, 잡채 등등...

누가 보면 오늘이 내 생일이라고 생각할 만큼 과하다 싶을 정도로 음식을 준비해 두셨고, 영국 가면 이런 거 제대로 못 먹을 거 아니냐며 든든하게 먹고 가라고 하시는 말씀에 표현은 안 했지만 내심 마음 한편이 울컥했다.

옷을 갈아입고 식탁에 앉았다.

아버지, 어머니, 나, 동생 이렇게 온 가족이 오랜만에 한 자리에 앉아 아침 식사를 하게 되었다.

(나와 동생은 대학 진학 이후로 따로 나와 살고 있어 주말이나, 가족모임이 아니면 모두 한 자리에 모이는 건 쉽지 않았다.)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했지만, 아무래도 날이 날이다 보니 주된 주제는 영국이란 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었다.

영국 날씨에 대한 이야기, 런던에서는 어디를 가보면 좋다더라 하는 이야기, 유럽에는 소매치기가 많아 위험하다는 이야기 등등...

평소에는 크게 표현하지 않던 동생도 무뚝뚝하게 한마디 툭 던졌다.

"크흠.. 조심히 다녀와라."

(누가 보면 남동생인 줄 알겠지만, 매우 무뚝뚝한 성향의 여동생이다.)

식사를 마치고 공항버스 시간을 확인한 후, 며칠 동안 준비해 둔 캐리어와 백팩의 짐들이 제대로 빠짐없이 준비되어 있는지 정리해 둔 리스트를 체크해 가며 확인했다.

'계절별로 입을 옷... OK.., 가서 공부할 때 참고할 책들... OK, 전자사전... OK.., 노트북에 넣어둔 비행기에서 볼 영화와 예능프로그램... OK..'

하나씩 확인하고 나니 이제는 버스 타러 가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누가 보면 이민 가는 사람처럼 많은 짐들을 메고 손에 끌고선 공항버스를 타러 이동하기 위해 집에서 가족들에게 인사하고선 집을 나섰다.


도착한 공항버스 정류장에서 시간에 맞게 온 버스에 가져온 묵직한 캐리어를 싣고, 자리에 앉자 곧 버스는 출발하여 인천공항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달리는 버스 차창으로 지나가는 익숙했던 풍경들, 이전에는 신경 써 보지도 않았던 풍경이었지만 신기하게도 그 순간만큼은 그 풍경들도 하나하나 머릿속에 새겨지듯 눈에 들어왔다.

물론 그것도 잠시였고, 나름 긴장했던 아침이었던 건지 내려오는 눈꺼풀을 이기지 못하고 잠에 빠져들었다.


무거웠던 눈꺼풀이 한결 가벼워지고 나서 눈을 떠보니 어느새 버스는 인천공항 출국 터미널에 도착해가고 있었다. 주변에서는 벌써부터 하차하기 위한 움직임으로 분주했다. 나도 한껏 기지개를 켜고 천천히 하차하기 위해 준비했다. 정류장에 도착한 버스에서 하나 둘 사람들의 짐이 내려졌고, 그 가운데 가장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는 나의 캐리어와 온갖 짐을 가지고 공항에 들어섰다.


인천공항 출국장은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수많은 인파로 붐비고 있었다.

그리고 출국장 특유의 설레는 기분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 기분을 아직 느끼기에는 내가 가야 하는  녹록지 았기에 열심히 항공사 카운터를 찾기 시작했다.

당시 내가 탑승했던 항공편은 캐세이퍼시픽(Cathaypacific)이었다. 인포데스크에 문의해서 카운터 번호를 찾아 도착해 여권을 보여주고 캐리어를 부친 후 항공권을 받아 들고, 주의사항을 전달받았다.

당시 내가 탔던 항공편은 1회 경유 편으로 홍콩에서 내려 3시간 대기 후 갈아타고 가야 했었다.

홍콩에서 갈아타야 한다는 내용을 전달받은 후 출국 게이트로 향했다.

그 뒤로는 모두가 익숙히 아는 바와 같이 보안 게이트를 통과하고 출국심사를 마친 후 면세장에 들어섰다.

지금 당장 나에게 필요한 게 없었기에 면세 쇼핑은 패스하고, 탑승구 앞으로 이동했다.

(장시간 이동해야 하는 것을 감안해 최대한 휴식을 취하면서 가야겠다고 생각했었다.)

당시 인천공항 탑승구 게이트에서(2010)

탑승 시간이 다가와 항공권과 여권을 준비해 탑승구로 이동했고, 승무원 확인이 완료되어 드디어 영국으로 가는 비행기로 첫 발을 내딛게 되었다.(홍콩에서 갈아타야 하긴 하지만...)

지정된 자리에 앉아 설레는 기분으로 벨트를 착용하고 기다리자 승무원의 안전 점검과 안내방송을 시작으로 분주하게 출발 준비가 시작되었다.

준비가 완료되자 비행기는 천천히 기수를 배정받은 활주로로 돌리기 시작했고, 활주로에 도착하자 이륙을 위해 양 날개의 터빈 엔진을 가열하게 돌리기 시작했다. 비행기 엔진 특유의 소리가 점차 빨라지면서 탑승한 비행기가 조금씩 앞으로 이동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가속하더니 좌석에 앉은 몸이 살포시 붕 떠오르는 기분과 함께 비행기는 내가 태어나 지금까지 생활하고 자랐던 한국 땅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당분간 안녕.. 한국


3시간 정도 시간이 지난 뒤 비행기는 천천히 고도를 낮추고선 홍콩 국제공항 활주로에 착륙하기 시작했다.

비행기가 게이트를 향해 가는 사이, 좌석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 역시 놓고 내리는 짐이 없는지 한번 더 확인하고 탑승구의 굳게 닫힌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고, 문이 열리고 승무원의 안내 멘트와 함께 하나 둘 내려 공항으로 들어갔다.

들어선 홍콩 공항은 몇 시간 전의 인천공항과는 또 다른 분위기였다. 인천 공항에도 수많은 인파들이 있었고, 그 안에는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있었음에도 아무래도 한국이었다 보니 느끼지 못했던 것 같지만, 이제는 타지인 홍콩 공항에서는 이곳이 국제공항이구나 하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던 것 같다.

어차피 3시간 정도 대기한 후, 런던행 비행기를 탑승해야 하는 일정이다 보니 공항에서 대기하기로 하고, 천천히 홍콩 국제공항을 둘러보다 문득 한국에서 내가 잘 도착했을지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는 가족들과 지인들에게 연락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휴대전화 번호를 정지하고 온터라 당장 연락할 수단이 없던 터였다. 그때 공항에서 각자의 다음 항공편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노트북으로 무언가를 하는 모습을 보고는 인터넷 연결해서 메신저로 연락하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라운지 한편에 충전 가능한 자리를 발견하고선 재빨리 가방에 넣어둔 노트북을 꺼내어 콘센트에 충전기를 꽂고 공용 와이파이를 잡아 인터넷에 연결하고선 메신저로 홍콩 공항까지 무사히 잘 도착했음을 알렸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덧 런던행 비행기를 탑승해야 하는 시간이 다가왔고, 탑승해야 하는 게이트를 향해 걸어 들어갔다.

홍콩 국제공항에서 다시 탑승한 런던행 비행기에서(2010)

승무원의 확인이 끝나고, 이제부터 10시간가량 탑승하게 될 비행기에 탑승해 자리를 세팅하기 시작했다.

목베개와 노트북, 이어폰을 꺼내고 백팩은 좌석 아래 넣어두었다. 자리를 세팅하고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런던행 비행기의 기체가 서서히 배정받은 활주로를 향해 기수를 돌리고선 빠르게 활주로를 박차고 날아올라 하늘 위로 솟구쳐 올랐다.

비행기가 어느 정도 안정 고도에 오른 후 기내식을 제공하기 위해 승무원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내 왼편의 탑승객들에게 기내식을 전달한 후 승무원은 밝은 미소의 얼굴로 바라보며 나에게 물었다.

"Beef or Fish?"

"Beef."

따뜻하게 제공된 기내식은 은박 도시락과 비닐 포장된 조그마한 빵, 잼과 버터 등이었다.

음료는 비행기에서 주는 술 한번 마셔보자는 생각에 와인 한 잔을 주문했다.

식사를 하며 들이킨 와인으로 인한 취기 때문이었는지, 아침부터 정신없이 돌아다닌 피로 때문이었는지 나도 모르는 새 눈꺼풀이 스르르 감겨왔다.

 

약간 서늘한 기운에 감겼던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보니 비행기 내부 조명이 대부분 꺼진 상태였고, 백색 소음과 같은 소리와 간간이 들려오는 사람들의 잔기침 소리만이 가득했다. 살며시 내려뒀던 기내 창문의 덮개를 올려보니 비행기는 까만 밤하늘 위를 날고 있었다.

'여기가 지금 어디쯤이지...?'

좌석 앞에 마련된 조그마한 스크린을 터치하며 비행기의 현재 위치를 대략적으로나마 확인할 수 있었다.

까만 밤하늘뿐이었지만 지도에서 보이는 위치는 러시아 하늘 어딘가인 것 같았다.

잠에서 깨고 나니 다시 잠이 오지 않아 노트북을 켜고선 런던 공항에 도착하면 바로 내가 해야 하는 일들이 무엇이었는지 적어둔 파일을 열어 확인했다.

'공항에서 짐 찾고 입국심사 마치고 나와 내 이름이 써진 팻말 들고 있는 택시기사 찾기... 홈스테이 하우스 도착하면 짐 정리하고 오늘은 마무리..'

비행기를 타고 런던을 향해 가고 있지만 이때까지는 당장 눈앞에 벌어진 현실이 아니었기에 그랬는지 내가 지금 런던에서 살게 된다는 것이 100% 체감된 기분은 아니었다. 단지 새로운 환경에 아무도 아는 사람도 없고 당장 기댈 가족도 없는 그곳에서 오롯이 내 힘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에 대항 생각이 우선이었다.

좌석 앞의 스크린에서 시간을 보내기 위해 영화 한 편을 틀고 보다 잠이 들었다.

이후에는 한번 제공되는 식사를 하고 멍하니 하늘을 바라봤다가, 준비해 온 영화와 예능 콘텐츠를 보기고 했고 그러다 살짝 잠이 들었다 깼다가 하기의 반복이었다.


지루하리만큼 긴 시간이 흘러 비행기는 서서히 착륙하기 위해 고도를 낮추기 시작했고 덩달아 잠에서 깬 나는 창문덮개를 올려보니 하늘 아래로 반짝이는 불빛들이 가득한 도시가 펼쳐져 있었다. 그것은 귀국할 때 바라보던 한국의 밤풍경과는 사뭇 다른 무언가였고, 이제야 내가 영국에 그것도 런던이라는 도시에 도착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안전하게 활주로에 착륙한 비행기는 게이트를 향해 움직였고, 기내 방송을 통해 현지 시간이 이미 자정을 넘어 새벽 1시가 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분주하게 짐을 챙기는 사람들 틈에서 나도 짐을 챙기고 내릴 준비를 마쳤다. 그렇게 나의 어학연수 첫 여정의 끝이 보이고 있었다.


Hello. 아니 Good Night 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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