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끼지 못한 것

by WineofMuse

나는 대부분의 물건을 아끼고 오래 쓰는 편에 속한다.

개인의 영역에서 특히나 더욱 그런 편이다.

신중을 기해 약간 비싸더라도 좋은 물건을 사서

망가지거나 수명을 다할 때까지 쓰곤 한다.

가끔은 미련을 떨며 버려야 할 시기를 놓친 물건을 쓰다가 곤란을 겪기도 한다.

행사 도중에 끊어진 벨트와 같은 난감한 상황이 지나야 만 겨우 벨트를 하나 장만한다.

한 번은 맞춤 정장을 맞추러 갔을 때이다.

벨트도 구매하고 길이를 맞추기 위해 착용하고 있는 벨트를 풀어 테이블 위에 올려보라 했다.

아무 생각 없이 올려둔 벨트는 너무나 낡아 옆구리가 터지고 곡선을 그리고 휘어 있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초라하고 가난한 내면을 들킨 것처럼 부끄러웠다.

이상심리로 인해 나는 꽤나 가격이 나가는 벨트를 하나 고르고야 말았다.

밝은 나무색의 가죽이 아주 부드럽고 연한 벨트였다.

이미 10년도 훨씬 전의 이야기고 그 비싼 벨트는 얼마 못쓰고 망가져버리고 말았다.

관리를 잘 못했으리라.

벨트를 사고 싶지 않아졌다.

이상한 마음 가짐이다.

내가 사서 영혼 없는 물건이 되는 것보다는 남이 사 주는 의미 있는 물건을 쓰고 싶었다.

그렇게 희한한 가치가 물건에 부여되었다.

수년 째 구매의지가 게으른 상황에 빠져있고

옷장 서랍에는 버리지 못해 쓸 수 없는 벨트만 여러 개 뒹굴고 있다.


언젠가는 15년이 넘게 쓴 연필깎이의 손잡이를 직원이 실수로 부러뜨린 적이 있다.

그다지 중요하지도 않은 물건이지만

당시에는 직원에게 약간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화를 냈던 적이 있다.

이내 괜찮다고는 했지만 직원의 마음은 다친 후였을 것이다.

물건은 다시 사면되었지만 다친 마음은 다시금 어찌할 바가 없다.

오래 사용하였다고 소중함의 지위를 얻는 것과

처음부터 소중했던 물건과의 차이를 어느 순간에는 혼동하게 된것이다.

무인양품에서 새로운 새하얀 연필깎이를 샀다.

아들 책상 위의 그 연필깎이 또한 망가지거나 부서지지 않는 이상 오래 장수할 운을 타고났다.


펜은 0.3mm 혹은 0.5mm 얇은 펜을 한 자루만 사서 쓰는 편이다.

간혹 세심하지 못해 책상 아래로 구른 펜이 펜끝부터 떨어지면

여지없이 이별을 고해야 한다.

잉크의 끝을 함께 보지 못해 못내 서운하고 미안했다.

다시 펜을 사러 문구점을 방문하고 맘에 드는 특정 브랜드의 펜을 사 온다.

하지만 가방 안의 가죽 필통에는 출처를 알 수 없는 다양한 펜들이 색깔별로 있다.

필통 안에서 자연 발생하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많은 펜이 왜 있는지 모를 일이다.

더 섬세하게 다뤄야 했다.

그래야 다 써버린 잉크와 껍질만 남은 펜대에 편안한 안녕을 고할 수 있다.


연필과 공책 등의 문구에 애착이 있다.

배우지 못한 결핍에 대한 반발심리일까.

성인이 되고는 노트북을 주로 쓰게 되었는데

이 또한 나에게는 문구의 영역이다.

쓰다가 다 쓰면 응당 폐기해야 할 물건이 노트북인 것이다.

다양하고 많은 브랜드를 쓰다 보니 노트북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다.

우연히 만난 클라이언트 중 노트북 브랜드의 마케팅 팀장님과 인연이 닿았다.

연금복권과도 같은 인연이었지만 그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서로를 금전으로 보지 않았기에 10년 넘게 거래와 우정을 나누고 있다.

그렇게 애정 하는 문구의 덕을 보는 날도 있는 것이다.


지금은 사업부가 날아간 LG에서 만든 플립 핸드폰을 10년 가까이 쓴 일도 있었다.

거의 두 동강이 나기 직전까지 쓰고 잡스형이 만들어준 아이폰 3으로 겨우 바꾸었다.

그마저도 구 여자 친구이자 현 와이프가 강력히 주장하여 바꾼 상황이었다.

미디어 자체에는 관심이 많을지언정 미디어 기기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다.

화면이 크거나 통화가 잘되거나 인터넷이 잘되면 그만이다.

지금 사용하는 핸드폰의 전 핸드폰도 그러했다.

기판이 완전히 사망 판정을 받을 때까지 서비스 센터를 2번이나 오가며 시간을 허비했다.

끝까지 살릴 방도를 찾았지만 당장의 불편을 더 이상 길게 가져갈 수 없었다.

물건에게 영혼이 있다면 아마 외쳤을 것이다.

"이제 그만 좀 놔줘"

애착이 집착으로 바뀌는 순간 물건도 사람도 서로가 피곤해진다.

쓸데없는 의미를 부여하게 되며 스쳐 지나갈 에피소드도 사건으로 비화시키곤 한다.

물건은 물건일 뿐이다.


딸아이의 애착 베개가 많이 헤져서 새 걸로 사준다고 했다.

정말 새 베개가 필요할까?

아이의 애착을 전이시킬 수 있을까?

아서라.

다 크다 못해 늙어가는 중인 나도 애착 베개 까지는 아니지만 항상 안고 자는 베개가 있어서 그 마음을 안다.

장난기가 발동했다.

항상 안고 자는 베개를 아이들에게 소개해줬다.


"애들아 인사해 새엄마야"

"아빠가 맨날 안고 자는 배게니깐 이제 새엄마라고 불러줘"


딸아이가 슬그머니 다가오더니 장난감 롤러로 베개를 막 문지르며 소리친다.


"응징이다! 물러나라! 새엄마!"


다 큰 어른의 애착은 자칫 궁상으로 비치기 마련이다.


물건에 대한 애정과 애착이 종이 한 장 차이이듯

우리 사는 세상에는 개개인의 미묘한 차이로 인해 서로가 본인의 감정을

규정하지 못하는 일이 왕왕 생기곤 한다.

아마도 내면을 찬찬히 들여다볼 시간적 여유가 없어서일 것이다.

잘못 인지된 감정은 오해를 부르고 단어 하나, 말끝의 높낮이에 따라

서운함을 느끼거나 말의 꼬투리를 잡아 채기 마련이다.

부러진 연필깎이 손잡이처럼 우리네 마음도 부러진 곳에 명확한 상처가 남았으면 좋겠다.


물건도 마음도 부러진 곳을 정확히 알면 제대로 붙여볼 수 있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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