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WineofMuse Mar 25. 2022
'까똑'
단조로운 음이 울렸다.
나영 엄마?
인지에게는 개인적으로 연락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오늘 바쁘신가요?"
금요일인 오늘은 차도 막히고 여차하면 야근을 하며 시간을 죽이다 갈 생각이었다.
서울의 트래픽은 차 안에서 시간을 보내나 늦게 출발하나 비슷한 도착시간을 기록하곤 했다.
"아니요."
"혹시 저녁에 선약 있으신가요?"
"있어도 저랑 밥 먹어요."
"네?"
"알겠습니다. 형수님"
무슨 일이실까?
돌연 둘이서 밥 먹자는 이야기에 뭔가 불안하기도 했지만 가벼운 스릴이 생기는 것 같았다.
가영에게는 우선 굳이 말해봐야 피곤할듯해서 얼버무리고 말았다.
"야근하고 천천히 갈게 밥 먼저 먹어."
"응."
"애들..."
-뚝
할 말이 있었는데 먼저 끊어버린 가영이었다.
그렇다고 둘 다 다시 전화를 다시 걸진 않았다.
중요한 내용이거나 굳이 다시 들어야 할 내용이라면 전화를 누군가는 걸겠지.
그건 아쉬운 쪽의 몫이었다.
미정과 인지는 입맛이 참 비슷했다.
둘 다 프렌치와 초밥을 좋아했고 특히나 와인을 너무나 사랑했다.
한 끼를 먹어도 제대로 멋지게 먹고 죽자는 주의인 두 사람은 한 끼에 매우 심혈을 기울이거나 조금은 예민하게 반응하곤 했다.
각자의 배우자들은 그런 둘을 이해하지 못했다.
있는 거 아무거나 대충 먹으면 되고 맛있으면 되지 무슨 음식에 의미를 따지고 마시는 것에 그토록 심혈을 기울이는지 모를 일이었다.
와인 하나를 고르는데 시간을 내어 마라톤 하듯 매장을 빙빙 도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떫은 술을 무슨 맛으로 마시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다며 성화였다.
"오늘은 초밥 어떠세요?"
"자주 가는 곳이 있는데 가격도 착하고 와인 리스트도 좋아요."
"네 가볍게 와인도 한잔 해요?"
"좋지요."
따듯한 수건으로 손을 닦는다.
금요일 저녁이라 살짝 웨이팅이 있었다.
"이런 날은 샴페인이죠."
"뭐로 하실래요?"
"뵈브 클리코 어떠세요?"
"좋네요."
[뵈브는 과부라는 뜻의 프랑스어이다.]
"저희 어쨌든 사석에서 만났는데 누구 아버님 말고 이름 부르는 건 어때요?"
"네? 형수님?"
"밀레짐 있나 볼게요."
[무슨 생각에 잠겨있는지 인지는 리스트를 보다 잘 못 들은 듯했다.]
"아니에요 그냥 기본급 마셔요."
"네. 밀레짐은 다음에 해요."
"더 좋은 날이요."
"네 알겠습니다."
둘의 취향은 어쩔 때는 같은 사람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비슷한 점이 많았다.
너무 똑같은 사람은 자주 싸우기 마련이라는 편견이 있다.
하지만 그건 친구나 형제 사이의 일이었다.
나이가 어느 정도 들어있는 성숙한 성인인 경우와 관계의 특수성이 잔뜩 부여된 상황에서는 사실 거의 싸우거나 대립하는 일이 없다.
이는 전적으로 애정이나 사랑을 기반으로 하는 인내심과는 결이 다른 차원의 이타심이었다.
둘은 각자의 취향이 어느 방향으로 향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10여 년이 넘게 각자의 배우자에게 크게 인정받지 못하던 취향의 세계는 어디든 분출할 곳이 있다면 정교하게 상황을 도모하는 것 또한 매우 비슷했다.
갈증의 방향과 형태가 비슷하다는 것은 마치 내면의 영혼이 비슷하다는 말과도 유사했다.
미정의 취미는 책 읽기였고 인지의 취미는 글쓰기였다.
둘 다 뭔가 읽는 걸 좋아한다는 건 비슷했다.
미정은 웹소설이며 단편소설, 에세이며 가리지 않고 읽었다.
인지는 뉴스를 매일 보는 활자 중독자였다.
무엇보다 글을 쓰는 사람은 자신이 쓸 글을 수백 번 고쳐 읽는다.
[그래서 글을 쓰면 인생을 두 번 사는 느낌이 난다.]
둘은 점잖뺄 일없이 초밥을 맛있게도 먹었다.
생각해보니 둘은 부부동반이 아닌 처음으로 둘만 식사를 하는 자리였다.
인지는 나름 자유롭게 시간을 내는 편이었지만 미정은 회사 집을 반복하는 집순이 같았다.
이미 작년의 일이 되어버렸다.
둘은 늦은 술자리에서의 사건을 잊은듯했다.
별다른 공식적인 언급은 서로 하지 않았다.
마치 매년 그랬던 것처럼 인지가 미정의 생일 전 와인 한 병을 선물했을 뿐이었다.
"윤 작가님 요즘에도 쓰시는 글 잘 보고 있습니다~"
미정은 발그레해진 얼굴로 인지를 작가로 부르겠다며 장난스럽게 이야기했다.
대체 그날 밤 무슨 이야기를 했길래 미정은 인지의 비밀 브런치 계정을 알고 있는 걸까.
세상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인지만의 비밀이 가득한 욕망의 항아리였다.
못내 부끄러운지 즉답을 회피하는 인지였다.
"커피 한잔 하러 가실래요?"
"네."
"맛있게 드셨나요."
"네 너무 즐겁고 맛있는 저녁 식사였어요."
"제가 살게요."
"아닙니다. 여기까지 오셨는데 제가 사는 게 맞지요."
"다음에 제가 형수님에게 가면 그때 사주세요. "
완강하게 버티고 서있는 인지를 막지 못했다.
엉거주춤하는 사이 카드를 쥐고 있는 미정의 손목을 인지가 잡았다.
둘은 어색하게 웃었다.
"저 사무실 구경해보고 싶어요."
"네.. 직원들 다 퇴근하긴 했을 건데 사무실 커피가 맛있을까요?"
"네. 뭐 전 뭐든 괜찮아요."
"네 그럼 가까우니깐 커피 한잔 하시고 대리 불러서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아. 저 차 안 가져왔어요."
"네 그럼 제가 대리 불러서 바래다 드릴게요."
"네"
"어머 대표실이 엄청 귀엽네요."
"커피 타 올게요."
뭔가 어색한 분위기를 감추려는 듯 인지는 냉큼 커피를 내리러 갔다.
"주문하신 아메리카노 나왔습니다."
재미도 없고 시덥잖은 멘트였다.
커피 한잔을 두고 인지의 자리 옆에 의자를 두고 앉았다.
막상 나란히 둘만 앉아 있으니 어디서부터 말문을 꺼내야 할지 애매한 분위기가 흘렀다.
"저녁 맛있게 잘 먹었어요."
"그런데 어쩐 일로 갑자기 저녁 식사를 하자고...."
"무슨 일 있으신가요?"
"아니에요. 그냥 근처 올일 있어서 생각나서 연락한 거예요."
"네."
"......"
말없이 커피를 마시는 둘은 뭔가 이상한 분위기가 싫었다.
그 적막함은 마치 없는 죄도 만들어 낼 것 같은 묘한 기류를 형성케 했다.
"저.. 형수ㄴ.."
-띨리링 띠리리링
인지가 무언가 말을 꺼내려는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을 확인하고 거절을 누르는 인지
"중요한 전화 아닙니다." 하고 웃어 보이는 인지였다.
그 목적 없는 선량한 눈웃음
그 눈웃음을 보자 그녀는 여기에 온 뚜렷한 목적을 생각해 냈다.
"저 인지 씨가 좋아요."
- 푸악!
마시던 커피가 살짝 뿜어졌다.
"네?"
"아.. 네 저도 형수님 좋습니다. 하하 핫~"
갑자기 누구 아빠에서 '인지'라고 실명을 불렀다.
그 뒤에 붙은 '좋아한다'는 한 문장, 한 번의 투구에 두 개의 돌직구가 들어온 반칙이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형님... 아.. 이야기를 안 할 수가.."
그런 인지의 마음을 십분 이해한다는 듯 미정은 천천히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대뜸 조커 카드를 한 장 인지에게 보여준다.
미정은 인생에 쓸 수 있는 단 한 장의 카드를 며칠 전 사용했다고 했다.
자세한 이야기를 좀 더 들어봐야겠지만 조금은 살벌한 이야기였다.
"무섭네 이 부부..."
미정의 생각이 무엇인지 전체를 알 수는 없었다.
그건 시간이 해결해줄 문제였다.
대략의 내용을 퍼즐처럼 맞춰 보자면 이랬다.
술자리에서의 키스 이후 미정은 인지의 비밀 브런치를 보게 되었고
인지에게 빠꾸 없는 돌직구를 날린 것이었다.
두 부부는 부부동반으로 식사를 하거나 여행을 간 적이 많았다.
두 부부의 아이들이 친하기도 했지만 우연한 계기로 친해진 이후 부쩍 통하는 게 많아서이기도 했다.
학부모 사이에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며 좋은 관계를 오래도록 유지하는 건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미정과 가영은 서로 죽고 못 사는 정도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말이 통하는 언니 동생 정도의 사이였다.
형님과 인지는 딱 수컷의 경계에 마주 보는 정도의 우직한 관계 정도였다.
어찌 보면 이 관계의 연속성은 미정과 인지가 가져다주는 게 맞아 보였다.
전혀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두 사람은 무슨 일인지 죽이 척척 맞았다. 영혼의 단짝이라며 둘을 놀렸다.
어떨때는 비슷한 게 아니라 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곤 했다.
인지도 그런 생각들에 많이 공감 했었다.
"내가 정상적인 가정에서 여자로 태어난 다면 아마도 형수님 같은 사람으로 살았겠지?"
인지는 생각이 많아졌다.
누가 봐도 표면적으로 단순한 불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두 가정을 파국으로 몰고갈 생각은 추호에도 없었다.
이런 기회를 그냥 흘려보내기에는 사실 욕망이 앞서기도 했다.
"한번 정도는 즐기고 다시 잊은 듯 살면 되지 않을까?"
학부모라는 관계적 특수성을 떠나 여자로서의 미정보다는 영혼의 동반자로서의 미정이 더 가치가 크다고 내심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틈날 때마다 브런치에 은유와 비유를 잔뜩 버무려 적어 두곤 했다.
미정은 영민한 여자였다.
단어의 뜻을 헤집어 그 안에 의미와 의도를 잘도 찾아내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미정이었다.
인지의 속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하는 미정이었다.
인지는 생수를 한병 집어 들었다.
지금 당장 결론을 내가보단 우선 지금 이대로의 감정을 그대로 둬 보기로 했다.
욕망과 애정, 그리고 사랑으로의 전환 그 어딘가에 있을 감정이었다.
무슨 감정인지 오랜 시간이 지나 까먹어버린 마음이라 쉽사리 떠오르지 않았다.
"첫 키스는 이미 했으니까.. 우리 첫 포옹해요."
인지는 미정을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미정은 샤워도 하고 향수도 뿌리고 꽃단장과 각오를 단단히 나온게 분명했다.
달콤한 향기가 났다.
첫 데이트였다.
여느 연인처럼 둘이서 밥을 먹고 차를 한잔하고 따뜻한 남자의 품에 안겼다.
미정은 오랜만에 찾아온 행복이 따끈했다.
어쩌면 예견된 수순이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둘 다 급발진은 하지 않았다.
순서의 손바뀜은 있었지만 나름 냉정하게 상황을 올바르게 보고 선을 정해 두었다.
이마저도 참 둘은 비슷했다.
각자의 가정을 파괴할 만큼의 악독함을 서로 가지고 있었지만 굳이 그럴 과격함을 행할 생각은 없어보였다.
둘은 서로의 평안과 안녕이 각자의 세상에서 가장 큰 가치임을 서로가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이심전심이 이토록 많은데 같이 안 살고 뭐 하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이 또한 둘은 명확히 알고 있었다.
"혹여라도 생활을 같이 할 생각은 추호도 하지 말아요."
"뒤도 안 돌아보고 콜이죠."
생활은 염증을 동반한다.
누구나 처음은 좋다.
염증의 속성은 오래된 익숙함이다.
익숙해지면 모든 것이 변질되기 시작한다.
사랑도 예외는 아니다.
인지와 미정은 인내심을 가지기로 했다.
손만 잡아도 좋을 시간을 최대한 늘리기로 했다.
인지는 품 안의 미정을 물 끄러니 내려다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정아 나도 네가 좋아."
미정의 단전과 척수를 통해 뇌 속까지 짜릿한 전기가 흘렀다.
흔히들 이야기하는 오선생이 선채로 잠시 왔다 간듯했다.
인지도 처음으로 미정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니"
"가 좋아."
[꺄아아아악!!]
"이 남자 짜릿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