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웹소설)

by WineofMuse

남편은 흥겨운 표정으로 여행을 가자 했다.

가영이 남편을 노려 보며 말했다.


"미정 언니랑 단둘이 갈 거야?"

"아니 그 집 가족이랑 우리 가족도 같이 가야지."

"난 아무렇지 않아. 불편하지도 않고."

"난? 나는? 내 생각은 안 해?"


인지는 뭔가 이상하다는 듯 가영을 쳐다보았다.


"가영아 무슨 생각해? 가족 여행 가자는 게 왜?"


가영은 남편의 속이 무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


미정과의 대화를 마친 후 가영은 인지를 닦달했다.


"당신 대체 본심이 뭔데?!!!"

"어쩌자는 거야?"

"이럴 거면 그냥 이혼하자 그래."


'이혼'이라는 단어가 기어이 가영의 입에서 나오고 말았다.

연애 초기부터 둘은 헤어짐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헤어짐을 가벼이 말하면 그때부터 이별이 시작되는 거라고 남편은 늘 이야기했었다.

인지는 가영의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듯 이야기했다.


"가영아 너는 지금 내가 좋니? 밉니?"

"미워 죽겠다."

"으히힝... 잉잉"


가영은 못내 흐느낀다.


"나는 아직도 가영이 네가 좋아."

"그 마음은 살면서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어."

"하지만 너나 나나 부부로써 의무를 다하지 못할 때는 분명 있었어."

"그때마다 나는 노력의 불씨가 살아 있다면 그 또한 이겨내리라고 생각했어."

"그 생각 또한 변함이 없어."

"......"


인지는 가영이 '착해서' 결혼을 결심했다.

가족을 만들기로 했고 아이를 가지고 헌신했다.

하지만 그 극도의 '선함'은 시간이 흐르고 인지에게 큰 위협이 되어 돌아왔다.


"여우랑은 살아도 곰이랑은 못 산다."


구전되어오는 격언이다.

가영의 삶은 수동적인 여성의 삶 그 자체였다.

조선 시대라면 충분히 먹힐만한 이야기였다.


가영의 꿈은 '가정주부'이다.

집에서 살림하고 빨래하고 밥 차리고 아이들 돌보고 뜨개질하고 TV 보며 인생을 마감하는 게 꿈인 사람이었다.

인지는 그런 가영이 어쩌면 자신과 천생연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늘 그렇듯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다.

집안은 날이 갈수록 쓰레기 장이 되어 갔다.

최첨단 무선 청소기는 한 달에 겨우 한두 번도 움직이지 않는다.

장을 봐온 음식은 썩어가고 배달음식 용기만 냉장고에 쌓여갔다.

아이들의 행색은 꾀죄죄 해졌고 화장실은 곰팡이가 피어갔다.

가난한 처갓집에는 무언가 계속 흘러들어 가는 듯했고 시댁이 없으니 인지의 편을 들어줄 이는 없었다.

부부관계도 말을 꺼내지 않으면 반년이고 일 년이고 소식이 없었다.


가영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노력하지 않는 무망한 삶을 '가정주부'라는 꿈에 대입시켜 놓은 사람이었다.


인지의 마음은 짜게 식었다.

하지만 가족을 버리고 새 삶을 산다는 건 한 번도 상상해보지 않았다.

자신과 같은 불행을 아이들에게는 절대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인지는 강해지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금의 마인드를 유지시켜야 했다.


부부 동반으로 식사를 할 때 가영이 인지의 접시에 뭔가를 덜어주거나 챙기면 인지는 짜증이 치솟았다.

가영은 인지에게 한 번도 스스로 음식을 해주거나 챙겨 준일이 없다.

그런 가영이 남들 앞에서 자신을 위한다는 듯 접시에 음식을 덜어주거나 먹여주는 모습은

있던 정마저 떨어뜨리는 효과를 가져왔다.


그럼에도 인지는 가영을 잃고 싶지 않다.

꿈꾸던 가정을 이루게 해 준 사람이고 아이들을 낳아준 그 헌신에 감사하며 존경한다.

인지가 죽으면 가장 크게 울어줄 사람이고 인지 또한 가영의 죽음에 세상 누구보다 가장 큰 슬픔을 느낄 것이다.

인지는 주변의 누구에게도 가영을 나쁘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뭐라 한들 아내였고 아이들의 엄마였다.

지금껏 지내온 시간과 헌신을 절대 가벼이 폄하할 건 아니었다.


"인지가 곰인지도 모른다."


인지는 미정을 진심으로 사랑한다.

가영도 사랑한다.

결과가 어떻게 흘러갈지 알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미정을 사랑하고 가영과 가족을 지키는 것만 신경 쓰기로 했다.

통제할 수 없는 구간이다.

인간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불확실'의 구간이다.

둘은 조급해하지 않기로 했고 늘 그렇듯 인지와 같은 유형의 사람인 미정은 그런 마음을 조금이나마 헤아려 주었다.


"그냥 두려구요."


***


가영은 부글 거리는 속을 누르고 침착하게 짐을 챙겼다.


"그래 어디까지 가나 보자."


각자의 차를 타고 여행의 목적지에서 만났다.

서로를 위한 끝없는 배려 속에 즐거운 저녁과 술자리로 이어졌다.

미정 언니와 남편이 눈을 마주치는 것도 꼴 보기 싫었다.

아이들이 자는 시간이 오고 산책을 나가자 했다.

형부는 아이들을 지키고 있겠다 했고 우리는 셋이 나왔다.


가영은 미정과 인지 사이로 쏙 들어갔다.

보란 듯 남편의 손을 잡았다.


"두 분이 손잡고 걸으시네요~ 보기 좋아요. 호호호"


머리채를 잡고 바닷물에 그녀를 던지고 싶었다.

그 마음보다는 지금 남편과 잡은 따스한 손이 너무 가슴 아렸다.

나란히 저 파도를 보며 사랑을 속삭였었는데...

남편과 나란히 밤바다의 백사장에 앉았다.

남편은 카디건을 가영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역시 내 남편이다.

그 순간이었다.

너무나 당연하게 그 여자가 남편의 옆에 앉았다.

아.. 먼저 앉은 게 실수였나?

만 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뭐야 왜 이런 그림이 그려지는 건데.

속에 커다란 왕지네가 기어 나오는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때 그녀가 말했다.


"셋이서 같이 바다 보니까 좋다. 그치?"


[진심이니?]

[우와 멘털이 강철이 아니라 슈퍼 티타늄 하이 울트라 합금이신가요.]


어이가 없어서 기절할 거 같았다.

그래도 일말의 양심은 있는지 약간을 떨어져 앉았다.

손을 잡거나 하는 일이 발생하면 남편의 목을 졸르고 머리카락을 쥐어뜯을 생각이었다.


추웠다.

남편에게 살짝 기대었다.

바람이 약간 많이 부네.

어쩐지 오징어 배가 안보이더라.

그래서 별이 가까웠구나.

가영은 세상의 지식과 우리가 사는 환경의 조화를 타당한 지식적 배경으로 대화를 나누는 그들이 신기하면서 질투가 났다.

가영은 그냥 하늘이 까매서 별이 많이 보이네 정도의 수준이라는게 그들에게 얼마나 한심해 보일까 하는 자격지심이 절로 들었다.

그가 내 마음을 아는 듯 스윽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거 아니야 가영아."

"뭘?"

"아냐."


인지가 눈웃음을 짓는다.


"가자."


손을 가볍게 허리로 가져가 일으켜 준다.

먼저 일어난 남편은 가볍게 미정 언니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운다.

머릿속에 스파크가 일어났다.

'으이...' 가영은 이를 꽉 물었다.

그 손 놔! 라고 하기에는 찰나였다.

금방 손을 뿌리친 미정.

인지는 아무렇지 않게 가영을 감싸 않는다.

그런 남편을 놓치고 싶지 않은 가영은 이제 빈틈없이 인지를 끌어안았다.

오늘 밤 이 자식을 어떻게든 이 한 몸 불사라서 나한테 푹 빠지게 만들고 싶었다.


거칠게 남편을 대하던 가영은 울음이 터져 나왔다.

안도일까 기쁨일까.

한 번도 그와의 관계에서 만족을 느끼지 못했던 걸까.


그렇게 우리는 천천히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부드럽고 천천히 서로를 배려하고 조심할 마음을 가지기로 했다.

하지만 그게 벽이 될 수도 있었다.

'마음아 생겨라!'라고 주문을 외운다고 생기는 게 아니었다.

관성은 쉽사리 바뀌지 않았다.

새 술은 새 부대에,

새 마음은 새사람에게 향할 수밖에 없었다.


형부를 매번 그렇게 거칠게 몰아붙이던 미정도 남편 인지 앞에서는 마치 처음 만난 사람처럼 목소리가 바뀌곤 했다.

그렇다.

새로 시작하는 연인들의 그 애틋한 경계를 이 둘은 무너뜨리고 싶지 않아 했다.

3개월이면 끝나는 사랑의 유효기간을 둘은 아주 길게 가져가려는 사람들이었다.

내 남편이 이렇게 인내심이 큰 사람이었다고?

둘은 나이를 먹더니 영악해졌다.

나에게는 왜 그렇게 안 해주냐는 이야기는 필요 없었다.

나도 그에게 그렇게 대해주지 못했으니까.


***


그날 이후 가영은 인지의 브런치를 훔쳐보았다.

정확하게는 지금껏 한 번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남편의 글쓰기를 들여다보았다.

글쓰기에 열심인 남편은 일부러 가영에게 의견을 물어보기도 하고 내용을 읽어 주기도 했었다.

그럴 때마다 속이 간질거린 가영은 그런 인지를 밀어내었다.

가영은 보고 듣는 사람이었지 읽고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쓰는 글에 관심이 없었다.

글자를 보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가영은 한 번도 남편이 쓴다는 글을 본 적이 없었다.

남편이 글을 읽어 준다고 해도 귀찮았다.

두어 번 중저음의 목소리로 읽어 주었지만 괜히 분위기를 잡으며 낮게 까는 목소리에 오글거렸다.

도저히 듣고 싶지 않아 외면했다.


그런 가영에 대한 서운한 부분이 그의 글에도 여실히 드러났다.

인지의 브런치의 아주 먼 과거 부분에는 가영에 대한 이야기가 참 많았었다.


"나에게도 이렇게 편지를 써 주었구나..."


가영은 못내 후회스러웠다.

최근 일자의 글들은 대부분 미정에 대한 글이었다.

인지는 미정에게 많은 글을 써주었다.

그 수많은 글에는 미정의 답글이 독후감처럼 빼곡히 적혀있었다.

글을 잘 쓴다는 칭찬과 함께 생활 속에 남편이 들어보지 못한 사소한 칭찬을 잊지 않고 적어두었다.

이제야 퍼즐의 한 조각이 맞추어졌다.


부부동반 식사를 할 때면 주변 사람이 불편하리만큼 미정은 남편 인지를 칭찬하고 추앙해줬다.

이 정도면 거의 남편이 그녀에게 무슨 사이비 교주 같았다.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이토록 빠져들게 만들었을까?

임자 있는 그 남자가 뭐가 그렇게 좋은 건데?


남편은 그렇게 모인 글들은 미정에게 읽어 주었다.

낮게 깔리는 그 목소리는 미정의 귀를 타고 허공에 흩어지겠지만...

그건 원래 내 거였다.

내가 들어야 하고 내가 느꼈어야 할 감정이고 감사함인데 다른 여자가 그걸 온전히 느낀 것이었다.

없던 시기와 질투가 샘솟았다.


"가지긴 싫고 남 주긴 아깝고."


미정은 적당한 선을 지키고 있었고 남편은 아쉽지만 강요하지 않고 그녀를 보내주었다.

가영은 글을 훔쳐 읽는 자신이 못내 가여웠다.

몰입감이 장난 아니었다.

관음증에 걸린 여편네 같았다.

하지만 너무 가슴 시리고 아팠다.

내 남편이라는 게 가장 큰 문제였지만 정말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짜릿한 로맨스였다.

그 불쌍한 본처가 가영이어서 문제였지만.


***


가영은 절친한 친구 경숙에게 이 사실을 털어놓았다.

친구는 분개하며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미친 내 이것들 내 손으로 죽이러 간다!!"


가영은 그런 친구를 진정시키고 뜯어말리는 자신이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마치 5개월 전의 가영과 같은 친구를 이제는 자신이 어느 정도 설득하고 어떤 부분은 그녀와 남편의 편에서 변호를 하고 있던 것이었다.

그런 가영의 태도에 친구는 상처받았다.


"너도 똑같이 물들어 가는 거니?"


"네가 그러니깐 그 새끼나 그년이나 너를 물로 보지."

"으이그!! 돌대가리야!!!"


"이럴 거면 우리 친구 그만해!"


자리를 박차고 경숙은 일어났다.


"그래... 진정하고 나중에 연락할게."


대답도 없이 잰걸음으로 달려 나가는 경숙

그럴 친구가 아니다.

언젠가는 돌아올 것이다.

우리는 보통의 사람들이고 친구이니까.


***


허락을 하고야 말았다.

남편의 공식적인 첫 외박이었다.

그녀와의 첫날밤을 보내라고 내가 보내 주었다.

무엇이 그들을 말릴 수 있을까.

남편은 나와의 관계도 좋고 너무 사랑한다 했다.

그녀와의 관계도 좋을 것이고 기다려진다고 했다.

그런 남편의 행복이 나 또한 좋았다.


그래 나는 미친 게 분명했다.


이게 뭐라고 인정을 해.

다른 여자들처럼 악을 쓰고 머리채를 잡고 가정을 완전하게 내 것으로 지켜내야 하는 거 아닌가?

아니면 당장 이혼하고 나도 다른 오빠나 연하의 남자를 찾아가야 하지 않나?

누굴 꼬셔?

이 나이에?

귀찮다.

연애의 그 지난한 과정과 인내가 너무나 지겹다.

해보지도 않았는데 지겨웠다.

다시 사랑은 설렐지 몰라도 그 연애의 밀당은 지친다.

이미 세상이 훤히 보였다.


하지만 내 남자의 마음은 도무지 보이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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