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WineofMuse Mar 26. 2022
꽃집 앞을 한참을 서성이는 인지.
무슨 상념에 빠져 있는 것일까.
인지는 고르지 못하고 뒤돌아 선다.
미정과 두 번째 데이트 날이었다.
토요일 오후 인지의 사무실에서 둘은 영화를 한편 보기로 했다.
각자의 집에는 적당한 약속이 있다며 거짓말을 해두었다.
단촐했다.
야근할 때 잠깐 쓰이는 라꾸라꾸 침대 두 개를 이어 붙였다.
노트북을 테이블 위에 두고 마실거리를 챙겼다.
남들처럼 영화관을 가고 식당을 찾고 술집을 가는 걸 상상할 수 없었다.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았고 둘은 아이디어를 짜내야만 했다.
비용을 들이자면 얼마든지 호텔이나 펜션을 통째로 빌려도 괜찮았다.
하지만 그건 너무 노골적이었다.
그저 둘만 함께 있는 시간이라도 좋으니 한 시간이라도 온전히 둘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첩보영화 같았다.
전화가 오면 잽싸게 정지 버튼을 누르고 전화를 받으러 나갔다.
그마저도 감내해야 했다.
둘은 지켜야할 선은 넘지 않았다.
딱 그 앞에서 브레이크를 잡고 멈추었다.
영화의 내용은 기억나지 않고 서로의 혀와 몸의 굴곡만 기억에 남았다.
둘은 행복했다.
오후의 햇살이 아스라이 미정의 얼굴을 비추었다.
눈부신 듯 찡그리는 꺼풀 사이로 눈동자가 햇살에 비치며 갈색빛이 진해졌다.
예쁘다.
눈가에 가볍게 입을 맞춘다.
"가야 해요."
풀어진 블라우스 단추 하나를 닫아주는 인지의 손등으로 미정의 가슴이 살짝 닿는다.
짐짓 모르는 척 눈길을 돌리지만 아쉽기는 미정도 마찬가지였다.
"사랑해."
미정이 인지의 귀에 속삭였다.
인지는 눈빛으로 끄덕인다.
인지는 이미 마음속 깊이 미정을 사랑하지만 조금 늦추어 말하기로 했다.
택시를 불러 미정을 먼저 태워 보냈다.
차를 가지고 가려는 인지가 잠시 회사 1층 로비를 머뭇거린다.
다시금 꽃집을 가보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뒤돌아 나왔다.
꽃을 주고 싶은 사람이 둘인데 하나는 줄 수가 없고 하나는 주면 이상해 보일 것 같았다.
***
가영과 미정이 만났다.
둘 앞의 커피잔이 얼어버릴 듯한 냉기가 흘렀다.
누구도 섣불리 말문을 열지는 못했다.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하루아침에 둘의 관계가 이렇게 될 수 있다는 것도 신기했다.
그 냉랭함은 누구도 표현할 길이 없었다.
누가 억울하고 슬플 것도 없이 가영은 이성을 찾기 위해 안감힘을 쓰고 있었다.
아무래도 미정보다는 내공이 딸릴 수밖에 없다.
선빵이 중요한데.
어디서부터 꺼내어봐야 하나.
심장이 마구 방망이질 쳤다.
드라마에서 보던 일이 나에게 벌어지다니...
믿기 힘든 현실에 현기증이 났다.
"언니."
"어떻게 그래요."
결국은 울먹이고 말았다.
미정은 무심하게 티슈를 건넨다.
각오가 서려있는 손짓이다.
미정은 세상 무서울 것 없지만 더러운 건 굳이 피하고 살아왔는데.
이런 경험을 감수할 만한 문제인가부터가 회의감이 들었다.
확신이 없었다면 피하면 될 자리였다.
누군가는 좀 더 감내해야 했다.
"둘이 어쩜 그래요."
"어쩌면 나를 알고 나를 빤히 보면서 그이와 그래요?"
"형부는 이거 알아요?"
"애들은 어쩌고요?"
K 드라마의 학습효과는 대단했다.
수십 년 동안 봐온 막장 드라마의 가장 말초적이고 자극적인 파트만 쏙쏙 빼내어 상상 속에 끼워 넣은 게 분명했다. 가련한 표정으로 울먹이는 가영 앞에 당당할 것도 없었지만 굳이 사과를 할 수 도 없었다.
미정은 오히려 가영의 얼굴을 앞으로라도 자주 보는 게 나으리라 생각했다.
"나 그이 사랑해."
가영의 시공간이 일그러졌다.
"사랑? 당신 미쳤어? 내 남자고 내 남편이야 누구 앞에서 사랑을 논해?"
"그게 두 개로 나눠질 수 있는 거야?"
"지금 당장 남편한테 물어볼까?"
"누굴 더 사랑하는지?"
아무 말이 막 나왔다.
"가영아."
"그게 순위로 매겨질 일이니?"
담담하게 묻는 이 여자.
내가 아는 그 언니가 맞나?
갑자기 이름을 부르는 미정에게 가영은 완전히 압도당하고 말았다.
"오늘은 그만하자."
"아냐. 끝까지 말해."
"그럼 인내심을 가지고 들어 봐."
"나도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될지는 몰랐어."
"순위를 매겨서 1등, 2등 할게 아냐."
"좋아하는 건 그냥 마음이 있으면 되는 거야."
"그 남자는 둘을 함께 좋아할 수도 있는 거지. 그게 왜 안된다는 거니?"
"너나 나나 그 사람이나 영원히 살 거 아니잖아."
가영은 기가 막혔다.
이 언니 드라마 작가였어?
"둘이 오손도손 살기로 했지만 너네도 10년 넘어가니깐 오손도손 하긴 했니?"
"어느 한쪽이 이기적으로 변하진 않았니?"
"처음에는 다 해줄 것처럼 했잖아."
"하지만 지금은 바쁘다 어쨌다 서로에게 미루기 바쁘잖아."
가영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대체 어떻게 살아야 저런 사고를 가지고 저게 당연한 듯 이야기하는 거지?
"대체 어쩌자고!!"
"월화수 금토일 나눌 거야?"
"하루는 네가 가지고 하루는 내가 가지고?"
"너네 하긴 하니?"
"그게 그렇게 중요해?"
정곡을 찔린 가영은 믿지도 않는 신을 찾게 되었다.
하느님 맙소사... 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내가 그렇게 가지 꽉 막힌 사람이었나?
이 사람 지금 제정신인가?
그게 맞다고 생각하니까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겠지?
"우리 서로 늙어 죽을 때까지 한 사람만 보기로 약속했잖아."
"계약서 쓴 거 아니잖아."
"그거 너무 낡은 언약이야."
가영은 내 남자를 가졌을 뿐이고 지키려는 것뿐인데.
이런 수모를 당하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미정은 벌떡 일어났다.
영어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가 올 시간이라는 게 이유였다.
"어디 할 때까지 해봐요!!"
미정의 뒷모습에 가영이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