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최 전성기, 이 떄의 와인은 어땠을까?
최근 뮤지컬 ‘물랑 루즈’의 공연 소식이 들리고 보니, 2001년 개봉작인 영화가 떠올랐다. 니콜 키드먼, 이완 맥그리거 주연의 뮤지컬 영화로, 19세기 말 몽마르트를 배경으로 가난한 작가와 물랑 루즈의 무희의 사랑을 그린 영화이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물랑 루즈’는 실제 프랑스 파리의 몽마르트에 위치한 카바레로 ‘붉은 풍차’를 의미한다. 1889년 개장하였으며, 이 안에서는 수많은 스캔들이 샴페인과 압생트를 타고 흘렀다.
당시 파리에서는 에펠탑이 세워지며 스스로를 ‘세계의 수도’라고 부르는 최고의 전성기였다. 물랑 루즈는 공연장, 술집, 사교 공간으로, 당시 시대상을 매우 잘 담아낸 공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바로 ‘벨 에포크(Belle Époque)’, 끝없는 진보의 한 가운데에 서있는, 말 그대로 아름다운 시대이다.
**
1870년, 프로이센의 총리인 철혈재상 ‘오토 본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는 통일된 독일 제국의 건설이라는 이념 아래 계속 프랑스와 마찰을 빚었다. 당시 프랑스 제 2제정의 황제였던 ‘나폴레옹 3세(나폴레옹 1세의 손자)’는 외교적인 고립 중에서도 패권을 지키기 위해 독일의 통일을 의도적으로 방해하고 있었다.
온천으로 유명한 독일의 도시인 ‘엠스(Ems)’에서 갈등은 고조된다. 스페인의 국왕 선임 지지 문제를 두고 프랑스의 사절과 프로이센의 국왕 빌헬름 1세가 엠스에서 만나게 된다. 프랑스는 정식으로 지지 철회를 요청하였으나, 본인 가문 사람이라는 이유를 들어 빌헬름 1세는 이를 거절한다. 문제는 사절이 이 내용을 본국에 전보를 보냈으나, 비스마르크가 이를 악의적으로 편집하여 언론에 공개를 해버린다. 이에 격분한 프랑스는 프로이센에게 전쟁을 선포한다. 바로 ‘보불 전쟁’의 시작이다.
보불 전쟁은 의외로 싱겁게 끝난다. 1870년 세당 전투에서 나폴레옹 3세가 포로로 잡혀버린다. 그리고 프로이센은 본인들의 장점인 철도, 동원병력, 포병의 우위를 앞세워 파리를 포위해버린다.
1871년, 빌헬름 1세는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 제국의 통일을 선포하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반면 프랑스는 이 전쟁으로 인해 알자스, 로렌 지방을 잃어버리게 되며 깊은 상처를 받게 된다. 또한 ‘파리 코뮌’으로 국가 내부의 분열과 정부군의 유혈 진압이 발생되며, 분열과 상처 속에서 제 3공화국이 출범한다.
보불 전쟁의 결과로 많은 프랑스 사람들은 상처를 받았다. 이들은 점점 전쟁을 회피하게 되고, 안정을 추구하게 된다. 마음의 상처를 문화, 예술로 보상받고 치유받길 원하기 시작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전쟁 후 그들의 문화는 더욱 더 소비되기 시작했다. 이것이 ‘벨 에포크’의 시작이다.
**
1800년대 초반부터 프랑스의 와인 생산 시장은 격변을 맞이하게 된다. 특히 그 중심에 선 지역은 바로 상파뉴이였다. 바브 니콜 퐁샤르당(Barbe Nicole Ponsardin, 일명 뵈브 끌리꼬)의 혁신으로 대량 생산이 가능해졌으며, 루이즈 포므리(Louise Pommery)는 브륏(Brut) 스타일의 대 유행을 이끌었다. 이들의 혁신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상파뉴는 매우 다른 스타일의 와인이었을 것이다.
1900년에 개최된 파리 만국박람회는 상파뉴의 폭발적인 인기를 가져왔다. 당시 파리 만국박람회는 그야말로 혁신의 중심이었다. 기술 과시를 뛰어 넘어 향후 미래의 생활을 제안하는 장이었다. 전기 조명, 지하철, 엘리베이터, 영화 등 다양한 라이프스타일과 관련된 기술들이 선보였다. 상파뉴도 이들 중 하나였다. 우연의 산물이 아닌, 인위적인 기술로 통제되어 만들어진 음료. 많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바와 동일한 혁신의 아이콘이었다.
상파뉴는 벨 에포크와 맞물려 엄청난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이와 더불어 와인에 화려한 병 디자인, 하우스 이름 노출, 스타 생산자 개념이 붙기 시작한다. 와인에 ‘이미지’라는 것이 붙기 시작한 것이다. 중세 시대에 하나의 ‘의례’로 소비되던 와인이, 르네상스와 산업 혁명을 거쳐 ‘생활’이 되었다면, 이 시기의 와인은 하나의 ‘문화’로 소비되기 시작하면서, 지금의 와인 소비 문화의 기초를 만들게 된다. 지금 우리가 직접 경험할 수 있는 레스토랑의 와인 리스트, 현대 소믈리에, 생산자 중심의 와인 브랜드, 빈티지, 테이스팅 문화는 모두 벨 에포크의 산물이다.
카페, 레스토랑, 살롱 문화의 확장도 와인 문화의 확장에 큰 기여를 했다. 여기서 사람들은 계급을 보여주고, 상호 관계를 맺으며 많은 사상을 교환했다. 와인은 그들에게 하나의 사회적 언어로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
1914년 6월, 범 슬라브 민족주의 계열의 한 청년의 총알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의 가슴을 관통하면서, 유럽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된다. 그리고 이 한발의 총성으로, 그들이 그렇게 사랑했던 시기인 벨 에포크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세계 1차 대전은 벨 에포크가 열었던 모든 문화의 창을 닫아버렸다. 상파뉴는 어느 덧 부적절한 사치품이 되었고, 와인은 긴장과 자기 위로의 술로 변하게 되었다. 상파뉴 지역은 바로 전선화가 되면서 많은 타격을 입게 된다. 많은 포도밭이 참호화 되고 셀러는 방공호나 야전 병원으로 쓰였다.
와인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를까?
아무래도 가장 많이 떠올리는 것은 사랑, 예술, 대화, 여유, 세련됨 등이 있을 것이다. 이 이미지는 처음으로 벨 에포크 시기에 심어졌으며, 지금까지도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그러기에 벨 에포크는 시대적인 하나의 현상을 뛰어 넘어, 지금까지 영향을 끼치는 근 현대사에 매우 중요한 시기임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와인도 한 몫을 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해 연재가 많이 늦었습니다.
향후 연재 기간을 지키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
와인파는 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