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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와인 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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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인 척한 고냥이 Aug 25. 2019

느리게 걷자

느긋하게 즐기다 보면 언젠가 와인의 기쁨에 도달해 있지 않을까

몇 년 전 KAIST 대학생들의 연쇄 자살이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된 적이 있다. 거기에 KAIST 교수의 자살이 이어지고, 한 해 자살하는 대학생의 숫자가 200명이 훌쩍 넘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파장은 더 커졌다. 문제의 주원인으로 지목된 것은 바로 ‘지나친’ 경쟁. 학생들은 학점과 취업 경쟁, 교수들은 논문 건수 등 수치 경쟁에 무방비로 내몰리고 있다는 지적이다. 사실 이런 무한 경쟁이 비단 대학사회만의 문제는 아니다. 우리 사회 전체가 ‘경쟁논리’에 지배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심지어 여가를 위한 TV 프로그램에도 경쟁의 논리가 녹아있다. 최근 대중의 시선을 사로잡는 방송 프로그램들은 오디션이나 면접 등 경쟁 상황을 그대로 재연한다. 출연자 간의 경쟁 과정에서 발생하는 긴장을 시청률 상승의 지렛대로 삼고, 승자와 패자가 나뉘는 냉혹한 결과가 호기심을 일으키며 몰입을 극대화한다. <슈퍼스타 K>, <나는 가수다>, <쇼 미더 머니> 등으로 시작한 오디션 프로그램은 <프로듀스 101>, <슈퍼 밴드>, <미스 트롯> 등으로 확장되고 있다. 이런 프로그램들은 방영 당일 포털 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순위를 점령할 정도로 화제의 중심에 선다.
 
경쟁의 맞은편에는 효율성이라는 축이 존재한다. 무엇이던 최소의 리소스로 최대의 성과를 거두어야 직성이 풀린다. 심지어 밥을 먹을 때도 맛집 애플리케이션이나 블로그 검색을 통해 평가가 좋은 집을 찾아야 마음이 놓인다. 여행이라도 갈라치면 시간을 허비하지 않기 위해 사전에 경로를 꼼꼼히 짜 둔다. 이를 테면 쇼핑은 A 백화점에서 하고 점심은 B 레스토랑에서 먹어야 하며 숙소는 반드시 C 호텔이 아니면 안 된다는 식이다. 물론, 아무 데서나 밥을 먹고 아무런 준비 없이 여행을 떠나는 게 맞다는 얘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자유 여행인데도 마치 패키지여행 마냥 꽉 짜인 일정으로 자신을 옭아매는 것처럼, 우리 스스로가 ‘효율’이라는 족쇄로 삶의 범위를 지나치게 축소시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안타까움에 하는 넋두리다. 생각해 보면 효율성을 극대화하려는 노력은 경쟁논리와 불가분의 관계인데, 둘 다 성공에 대한 집착이 강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잘 모르는 가게라도 한번 시험 삼아 먹어 볼 만 한데, 관광객이 드문 한적한 거리의 정취에 빠져 보는 것도 괜찮을 텐데 우리에게는 그럴 여유가 없다. 비록 한 번이라 할 지라도 어떻게 실수를, 아니 ‘실패’를 용납한단 말인가. 이런 점에서 현대인들은 모두 실패에 대한 공포를 안고 사는지도 모른다.
 
눈앞의 경쟁, 그리고 효율만이 추구해야 할 가치가 되면 결국 삶의 여유는 줄어들 수밖에 없다. 마음의 여백은 번잡함으로 채워지고 문화와 예술은 그 빛을 잃게 된다. 예컨대 극단적인 효율만을 추구한 음식문화를 상상해 보자. 아마도 영양소가 고루 갖춰져 있는 알약 정도로 귀결되지 않을까. 물론 음식의 풍미까지 잘 담아낸 그런 알약 말이다. 우리는 그 알약을 간편하게 삼키기만 하면 된다. 스테이크 맛도 나고, 1982년 빈티지의 샤또 무똥 로칠드(Chateau Mouton-Rothschild)의 맛도 나고… 그런데 연인과 마주 보고 앉아 이런 알약 식사를 즐긴다면 진정 행복할지는 잘 모르겠다. 아, 연인도 필요 없을지도 모르겠다. 영화 <매트릭스> 같은 세계에서 가상 애인으로 대체하면 되니 말이다. 결과만이 중요하고 과정은 무시되는 사회의 결말이 이런 모습일까.
 
와인 얘기를 하는 마당에 뜬금없이 웬 경쟁이요, 효율성 얘기냐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와인을 대할 때도 우리는 경쟁과 효율에 관한 강박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부끄럽지만 나도 그 점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바이다. 왠지 모르게 그랑 크뤼(Grand Cru)와 슈퍼 투스칸(Super Tuscan) 와인에 한 번 더 눈길이 가며, 세상에 몇 병 없는 개러지 와인(garage wine)이며 컬트 와인(cult wine)들을 동경한다. 어떤 프리미엄 와인을 얼마나 마셔 보았나 하는 문제로 은연중에 자존심을 세우기도 한다. 뉴 밀레니엄을 전후하여 계속되고 있는 프리미엄 와인들의 가파른 가격 상승률이 이런 심리를 그대로 반영한다. 프리미엄 와인이 아니라도 마찬가지다. 파커 포인트가 낮은 와인을 사려면 왠지 불안하고, <와인 스펙테이터>의 연말 100대 와인에 관심을 집중하기도 한다. 점수에 따라 와인의 줄을 세우고 순위를 매기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 사이트 저 사이트에서 리뷰들을 찾아다니며 평가를 비교하고 비교하며 또 비교한다. 하지만 진정 와인의 가치를 느끼려면 그런 평가에 의존해야만 하는 것일까.
 
파커의 점수에 맞추어 와인을 구매하고 전문가의 리뷰를 참고하는 것은 분명 효율적일 수 있다. 품질이 좋은 와인을 찾겠다는 의지와 노력이 나쁜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하지만 와인을, 그리고 우리의 삶을 효율성의 잣대만으로 재단할 수는 없다. 게다가 전문가와 언론의 평가는 본인이 아니라 남의 시각이다. 품질 평가에는 일반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기준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평가자의 취향 또한 은연중에 반영되기 마련이다. 게다가 와인은 보관 상태와 이동경로 등 이력에 따라 성격이 달라질 수 있거니와 음용 시 곁들인 음식, 장소와 분위기, 함께 한 사람 등 상황 별로 그 감흥이 달라지니 어떻게 타인이 평가만을 절대적인 선택의 기준으로 삼을 수 있단 말인가. 무엇보다 굳이 와인 한 병 마시는 데도 남의 평가를 확인하며 눈치를 봐야 하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자신의 일은 스스로 하자’는 유명한 격언(?)도 있는 마당에. 


반드시 단번에 좋은 와인, 내 취향에 맞는 와인을 골라내야 할 필요는 없다. 우리네 인생은 기니까. 몇 번의 실패를 거치며 천천히 와인 하나하나를 음미하다 보면 와인 스타일에 대한 경험이 쌓이고 품질에 대한 기준이 생길 것이다. 나아가 내 취향의 와인을 찾고 인생의 와인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한 번 실패했다고 다시는 와인을 못 마시게 되는 것도 아니다. 인생의 패패자가 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물론 와인에 대해 약간의 지식을 쌓으면 선택에 도움이 된다. 전문가와 각종 매체의 평가나 리뷰 등도 그 ‘지식’의 일부로 활용할 수 있는 것일 게다. 그 지식을 밑천으로 다른 이가 아닌 나 자신의 관점으로 와인과 마주할 수 있는 혜안을 천천히 만들어 나가면 된다. 단순히 등급이 높고 평가가 좋으며 가격이 비싼 와인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나만의 와인을 찾아가는 과정, 생각만 해도 즐겁지 아니한가. 드넓은 와인의 세계에서 느긋하게 그 과정을 즐기며 느리게 걷자. 언젠가는 와인의 기쁨에 도달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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