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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와인 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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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인 척한 고냥이 Mar 21. 2020

봄이 오면

4월은 잔인한 달

봄이 오면
하얗게 핀 꽃 들녘으로
당신과 나 단 둘이
봄 맞으러 가야지
바구니엔 앵두와 풀꽃 가득 담아
하얗고 붉은 향기 가득
봄 맞으러 가야지    
- 김윤아, <봄이 오면> 中 


봄. 만물이 소생하는 계절이다. 봄 하면 포근한 기온과 따사로운 햇살, 연둣빛으로 돋아나는 새싹과 화사하게 피어나는 꽃들이 떠오르지만, 위에 소개한 김윤아의 노래처럼 왠지 모를 애조(哀調)가 느껴지기도 한다. 사실 봄은 우리의 생각만큼 온화하고 너그럽지 않다.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아래로 차가운 바람이 살결을 에이고, 봄의 아름다움을 시기하는 꽃샘추위는 옷깃을 여미게 한다. 갑자기 찾아온 봄에 적응하지 못한 신체엔 우울증이 찾아오고, 타나토스(Thanatos)적 충동은 극대화된다. 영국의 시인 T.S 엘리엇(Thomas Sterns Eliot)도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추운 겨울을 견디고 봄을 맞이한 포도밭 또한 인간과 같은 심정일 지 모른다. 지난해 수확을 마치고 잘려나간 마른 가지 끝에서는 싹을 틔우려는 포도나무의 눈물이 알알이 맺혀 떨어진다. 새 생명을 잉태하기 위해 겪는 고통과 그로 인해 흘리는 눈물은 사람이나 나무나 마찬가지인 것일까. 눈물로부터 태어난 싹은 초봄의 궂은 날씨와 서리를 견뎌야 비로소 포도가 영글 가지와 잎을 만들어낼 수 있다. 


이렇게 희열과 애수가 공존하는 봄에 어울리는 와인이 바로 피노 누아(Pinot Noir)가 아닐까. 영롱한 봄의 향취를 가득 담아 루비 빛으로 밝게 빛나는 피노 누아 와인의 기저에는 끝 모를 심연이 자리 잡고 있다. 파릇하게 초목이 자라고 화사한 붉은 꽃이 피어 있는 넓은 들판의 이미지는 아직 한기 어린 깊은 숲 속 호숫가의 이끼 낀 바위와 같은 음성적인 이미지와 맞물려 모순적인 인상을 만들어낸다. 생기를 주는 짜릿한 산미와 아쉬움을 남기며 아련히 사라지는 여운은 흐드러지게 피었다가 순식간에 흩날려 사라져 버리는 벚꽃과도 같다. 


4월이 오면 피노 누아를 준비해 보자. 오래 숙성한 고급 부르고뉴 그랑 크뤼일 필요는 없다. 친근하고 편안한 한 병이면 족하다. 마개를 열어 넓은 잔 가득 와인을 따르면, 마음엔 온통 봄이 흐드러지고 들녘은 활짝 피어날 테니. 그러면 됐다. 허전한 마음엔 그걸로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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