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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인 척한 고냥이 Sep 10. 2019

가끔은 내키는 대로 즐겨 보자

와인과 음식 매칭에 대하여

“만두의 친구는 찐빵이듯이, 라면의 친구는 구공탄이죠~”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얘기냐고요? 사실 이 말은 김수정 화백의 인기 만화 <아기공룡 둘리>에 등장하는 마이콜이 둘리, 도우너, 또치 등과 결성한 밴드‘핵폭탄과 유도탄들’이 부르는 노래 가사의 일부입니다. <아기공룡 둘리>가 1987년에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지면서 멜로디가 입혀져서 당시 초등학생들 사이에서 상당한 인기를 누렸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이 가사는 논리적으로 오류가 있습니다. A:A’=B:B’라는 대응 관계에서 범주 오류를 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두의 친구로 제시된 것이 식품인 찐빵이라면 라면의 친구 또한 식품 카테고리 안에서 제시되어야 하는데 식품이 아닌 연탄구멍이 제시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우리가 ‘라면과 구공탄’에 원한 것은 논리 법칙이 아니라 즐거움이었고, 신나게 웃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니까요.


와인 만화 <신의 물방울> 때문일까요? 와인을 마시는 사람들 사이에 '마리아주'라는 말이 유행했던 적이 있습니다. 와인과 음식이 '결혼'을 하는 것처럼 딱 맞는 짝을 찾아야 제맛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죠. ‘굴에는 샤블리(Chablis)’같은 것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음식 맛과 와인 풍미 사이의‘대조와 순응’이라던가, ‘동질성, 압도, 조화’와 같이 전문가들이 제시하는 어려운 원리들도 있습니다. 이런 원리들을 따지지 않더라도 동행인의 취향이나 음용 환경, 모임의 목적과 분위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맥락을 따집니다. 와인과 음식 자체는 물론 TPO, 즉 때(Time)와 장소(Place), 그리고 상황(Occasion)까지 모든 것을 감안해야 한다는 얘기죠. 하지만 이런 걸 모두 고려하다 보면 머리는 복잡해지고 피곤함이 몰려옵니다. 제대로 즐기자는 취지는 퇴색하고 압박만이 남는 모순적 상황이랄까요. 이럴 땐 차라리 그냥 내키는 대로 먹고 마시는 게 더 즐거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다 보면 의외로 흥미로운 경험을 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꼭 전해지는 '법칙'에 맞추어 먹지 않아도 충분히 즐거울 수 있다는 것이죠. 

 

10년 전쯤 지인(사실은 까마득히 높은 상사)을 따라 간 음식점에서 의외의 마리아주를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서울 염창동 아파트 단지 내에 위치한 평범한 해산물 음식점이었는데 털게 샤부샤부를 제대로 내 왔습니다. 무난해 보이는 가게 분위기와는 달리 음식은 첫인상부터 강렬한 포스를 풍긴 것이죠. 싱싱한 털게를 안주 삼아 처음엔 맥주를 마셨는데 높으신 지인 분이 갑자기 와인이 마시고 싶다며 와인을 주문했습니다. 주인아주머니가 가져온 것은 프랑스 보르도 메독(Medoc AOC) 지역의 레드 와인이었습니다. 그 음식점에서 취급하는 유일한 와인이었죠. 게다가 냉장고에서 막 꺼내온 듯 병 표면에는 습기가 서리다 못해 물방울이 맺혀 있었습니다. 해산물 음식점인데 와인은 메독의 레드 와인 밖에는 없고, 게다가 온도는 매우 낮은, 상식적으로는 최악의 상황이죠. 해산물의 비린맛과 와인의 떫고 쓴 맛이 동시에 강조될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그분은 나를 보며 ‘해산물이라고 꼭 화이트와 마셔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냐’며 진지한 얼굴로 동의를 구했습니다. 저는 차마 고개를 가로저을 수 없었죠. 뭐, 사실 그렇지 않습니까. 음식과 술은 먹고 마시는 사람이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되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의외로 털게와 메독 레드 와인의 궁합이 나쁘지 않았습니다. 아니, 좋았다고 표현하는 게 더 적절해 보입니다. 붉은 베리와 검은 체리 풍미를 은근하게 풍기던 미디엄 바디의 메독 와인은 털게 살의 감칠맛과 어우러져 절묘한 조화를 이끌어냈습니다. 당시에도 해산물은 반드시 화이트 와인과 매칭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결코 아니지만 레드 와인, 그것도 보르도 와인과 이 정도로 잘 맞을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었습니다. 의외의 조합이 이렇게 매력적인 결과를 만들어내다니, 솔직히 놀랐죠. 물론 모든 메독 와인이 털게와 맞는다고 얘기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사람마다 호불호도 존재하겠죠. 하지만 너무 편견에 사로잡혀 모든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할 필요는 없다는 얘깁니다. 고인이 되신 모 대기업의 정 모 회장님도 그러셨다죠. "이봐, 해 봤어?"


이후 석화와 보졸레 누보, 생 삼겹살 구이와 오크 숙성 샤르도네 등 일반적으로 시도하지 않는 조합들이 저의 음식-와인 궁합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물론 전통적인 매칭과 전문가의 조언을 참고하여 음식에 맞는 와인을 선택하는 것이 일반적인 와인과 음식의 궁합을 찾는 가장 손쉬운 방법일 겁니다. 하지만 가끔은 그냥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마시고 싶은 대로, 혹은 친구나 가족이 골라 주는 대로 마셔 보는 것은 어떨까요. 경험해 보지 못한 맛의 향연에 입안의 미뢰들이 기뻐 춤출지도 모릅니다. ‘라면의 친구는 구공탄’이라도 별 상관이 없는 것처럼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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