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와인21 멤버들이 모여 블라인드 테이스팅을 할 때였다. 출품된 세계 각지의 와인들이 착 달라붙는 천으로 가려져 있었는데, 참석자 한 명이 대략적인 병의 길이와 형태, 천 바깥으로 1cm 정도 삐져나온 주둥이만 보고 와인의 정체를 유추해냈다. 덕분에 그는 '병믈리에'라는 농담 섞인 별명을 얻었다. 사실 우리의 관심은 보통 내용물에 쏠려 있다. 와인이 담긴 병에는 큰 관심이 없다. 하지만 와인병에도 각자 개성이 있고 특별한 의미가 담긴 경우도 많다. (그러니 훌륭한 병믈리에는 민감한 와인 전문가의 자질을 지녔을 가능성이 높지 않겠는가!). 게다가 와인병은 와인의 발전과 대중화에도 큰 역할을 담당해 왔다. 그러니 와인의 보디가드인 와인병에도 와인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조금쯤 나누어 줘도 괜찮을 것 같다.
와인병의 역사
와인병, 그러니까 유리로 된 와인병을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시기는 18세기 무렵이다. 그전까지 와인들은 보통 오크통 채로 팔려나갔다. 그보다 더 전에는 암포라, 그러니까 길쭉한 항아리 모양의 토기를 사용했을 것이다. 와인을 통째로 구입한 소매상들은 암포라나 오크통에 담긴 와인을 고객이 가져온 주전자나 주머니 등에 덜어서 팔았다. 유리의 발명은 기원전 1500년 이전이고 로마시대 유리병이 발견될 정도로 그 역사가 오래되었지만, 쉽게 깨지는 데다 가격 또한 비쌌기 때문에 대중화되기는 어려웠다. 유럽의 경우 17세기가 되어서야 영국에서 두껍고 내구성이 좋은 유리병을 발명하면서 와인 용기로 사용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렸다. 와인 업자들은 점차 내용물의 맛과 향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유리가 와인 용기로 최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때마침 코르크라는 최적의 마개가 본격 도입되면서 유리병의 사용은 더욱 확산되었다. 예컨대 샹파뉴(Champagne) 지역에서 돔 페리뇽이 하늘의 별에 비유되는 버블을 와인 속에 가둘 수 있었던 것도 더욱 튼튼해진 유리병을 사용한 덕분이었다. 18세기 초에 생산된 와인병은 하단이 넓고 짤막한 형태였는데, 보관 및 운송 편의를 위해 점점 더 길고 슬림한 형태로 진화해 19세기 초중반 즈음에 요즘과 유사한 모양을 확립했다.
와인병의 형태
와인병의 모양은 지역, 혹은 품종 별로 다르다. 유리병이 사용되면서 각국의 와인 산지들은 생산되는 와인의 스타일, 혹은 와인 생산자들의 요구에 맞는 와인병 형태를 발전시켰다. 애호가라면 높은 어깨로 대표되는 보르도(Bordeaux) 스타일과 완만한 어깨의 부르고뉴(Bourgogne) 스타일 병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타닌 함량이 많은 보르도 와인은 숙성이 진행되면 침전물이 많이 발생하기 때문에, 따를 때 침전물이 어느 정도 걸러지도록 어깨를 만들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반면 타닌이 적은 부르고뉴는 숙성 후에도 침전물이 비교적 적기 때문에 어깨가 없는, 우아하고 매끈한 형태의 와인병을 사용한다. 이 두 스타일은 와인병의 대표적인 형태로 자리 잡았다. 이외에 리슬링(Riesling) 등 화이트 와인으로 유명한 알자스(Alsace)와 독일의 모젤(Mosel), 라인(Rhein) 지역은 얇고 긴 플루트 형태의 와인병으로 잘 알려져 있다.
독특한 와인병도 있다. 이탈리아 키안티(Chianti) 지역의 와인병인 피아스코(Fiasco)는 둥그런 아랫부분을 볏짚으로 감싸 세워 놓았다. 피아스코는 14세기 보카치오의 소설 <데카메론>에도 언급될 정도로 유서 깊은 스타일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잘 사용되지 않는다. 키안티 현지에서나 관광객용으로 가끔 보일 뿐이다. 독일 프랑켄(Francken) 지역의 병은 납작한 플라스크 모양이다. 18세기부터 사용된 이 병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해 큰 호응을 얻었다. 복스보이텔(bocksbeutel)이라고 부르는데, 염소의 음낭이라는 뜻이다. 아무래도 프랑켄 사람들은 납작한 플라스크보다는 그것과 더 닮았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참고로 프랑켄 지역과는 아무 상관없는 포르투갈의 스파클링 로제 와인 마테우스(Mateus)도 복스보이텔과 유사한 와인병을 사용한다. 이탈리아 마르케(Marche) 지역을 대표하는 화이트 와인인 베르디키오(Verdicchio) 와인병은 작은 암포라, 혹은 물고기와 비슷하다. 이 형태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인 1970년대부터인데, 언뜻 물고기 모양과도 비슷한 모양이 가볍고 짭조름한 와인의 풍미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하지만 역시 독특한 병 모양은 취급도 힘들고 소비자의 호불호도 있어서, 최근에는 일반적인 병을 많이 사용하는 추세다. 한국에 수입되는 베르디키오 와인인 '우마니 론키 카잘 디 세라(Umani Ronchi Casal di Sera)'도 부르고뉴 스타일 병을 쓴다. 최근엔 병의 형태도 보르도/부르고뉴 스타일 병과 개성적인 형태로 양극화되는 느낌이다.
와인병의 색깔
보르도 와인병은 주로 짙은 녹색이다. 부르고뉴 와인병도 유사하거나 조금 더 가벼운 녹색이다. 옆 나라 독일의 경우 라인강 유역의 와인 생산지들은 전통적으로 짙은 갈색 병을 사용했고 모젤 지역은 녹색 병을 사용했다. 하지만 모젤에서도 갈색 병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고 그 반대도 존재한다. 포트(Port)나 셰리(Sherry), 마데이라(Madeira) 같은 주정강화 와인도 주로 짙은 갈색 병에 담긴다. 사실 투명한 병을 사용하는 일부 로제 와인이나 스위트 와인 등을 제외하면 와인병의 색은 대부분 녹색 혹은 갈색이다. 왜 와인 생산자들은 녹색이나 갈색을 선호하는 걸까? 혹자는 와인이 숙성되며 생기는 침전물이 잘 안 보이게 하기 위해서 짙은 색 병을 쓰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혹은 지역적 상황에 따라 그렇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 정확한 진실은 알 수 없지만, 갈색 혹은 녹색 유리병이 와인을 더 안전하게 보호하는 것만은 확실하다. 와인은 온도나 진동뿐만 아니라 빛에도 취약하다. 때문에 투명한 병을 쓰게 되면 와인이 쉽게 산화하고 맛이 변질되는 등 해를 입게 된다. 와인 말고도 맥주 등 다른 주류들이 녹색이나 갈색 병을 많이 사용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와인의 아름다운 컬러를 병에서부터 감상할 수 없는 것이 아쉽지만, 와인의 안녕을 위해 그 정도는 이해해 주도록 하자.
와인병의 용량
와인병의 표준 용량은 750ml다. 하지만 이렇게 정형화된 것도 20세기에 들어와서부터다. 그 전에는 지역마다 제각각이었다. 지금까지도 다른 크기의 병을 표준으로 사용하는 지역도 있다. 쥐라(Jura) 지역의 특별한 와인 뱅 존(Vin Jaune)은 클라브랭(Clavelin)이라고 불리는 620ml 병에 담도록 규정하고 있다. 어쨌거나 주로 경제적인 편의성을 이유로 750ml 병이 대중화되었고, 1970년대 표준화되었다.
그럼 다른 크기의 병은? 750ml 병을 기준으로 절반은 하프 보틀(half bottle), 두 배는 매그넘(Magnum)이다. 여기까지는 익숙하다. 하프 보틀보다 더 작은 병에는 187.5ml(1/4병) 짜리 피콜로(Piccolo)와 200ml 용량의 쿼터(Quarter)가 있다. 주로 샴페인 같은 스파클링 와인에 자주 사용한다. 매그넘보다 더 큰 병은 이름이 좀 어렵다. 대부분 성경에서 따온 이름으로, 한국인에겐 낯설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라면 약간은 쉬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족보도 살짝 꼬여 있다. 샹파뉴를 비롯한 기타 지역과 보르도에서 사용하는 명칭이 다른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샹파뉴에서는 3L(4병) 용량을 제로보암(Jeroboam)이라고 부르지만 보르도에서 제로보암은 4.5L(6병)이다. 3L는 더블 매그넘 혹은 마리-잔느(Marie-Jeanne)라고 부른다. 반면 샹파뉴에서 4.5L는 르호보암(Rehoboam)이다. 6L도 다르다. 샹파뉴는 므두셀라(Methuselah), 보르도는 임페리얼(Imperial)이라고 부른다. 이런 이름들이 익숙해질 정도로 커다란 병들을 자주 접하고 마개를 열 수 있는 축제 같은 삶을 살면 좋으련만.
병에 대한 이런저런 상식들
이외에 병의 외관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들이 있다. 일단 병의 바닥. 보조개처럼 움푹 파인 부분을 펀트(punt)라고 하는데, 예전에는 크고 깊을수록 고급 와인이라는 풍문이 있었다. 하지만 이는 병이 크고 묵직할수록 좋은 와인이라는 말처럼 근거가 빈약하다. 펀트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명확히 증명된 것은 없다. 다만 펀트는 샴페인 같은 스파클링 와인의 병 내 압력을 분산시키는 역할을 한다. 숙성된 와인의 경우 음용 전 세워 놓으면 침전물이 펀트 옆의 틈새에 잘 모여든다. 또한 바닥이 편평한 병보다 세워 둘 때 좀 더 안정적이다. 따를 때 엄지손가락을 넣는 손잡이라는 얘기는 어떨까? 직접 해 보면 그 말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금세 알 수 있을 것이다.
펀트 외에도 병 하단을 자세히 보면 양각으로 튀어나온 다양한 표시들을 발견할 수 있다. 점, 숫자, 알파벳 등인데 특별할 것 없어 보이지만 세상에 의미 없이 존재하는 것은 없다. 표시들은 각각 병의 제작 정보, 생산연도, 제조 지역과 공장, 생산자, 제조 기기, 용량, 직경 등을 의미한다. 병마다 형태와 순서, 구성 등이 조금씩 다른데 사실 소비자가 알 필요 없는 내용들이다. 하지만 인간은 호기심의 동물이니까, 알쓸신잡이 원래 흥미로운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