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yrah or Shiraz)
이상하다. 한 품종을 소개하는 아티클 제목에 두 개의 이름이 함께 쓰였다. 시라(Syrah), 그리고 쉬라즈(Shiraz). 와인은 세계 각지에서 만들어지는 만큼, 같은 품종을 지역 별로 다르게 부르는 경우는 종종 있다. 그래서 와인 개론서의 품종 소개 페이지에 동의어를 소개하는 항목이 있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주요 국제 품종 중에 이렇게 두 개의 이름이 동시에, 거의 동등한 비중으로 통용되는 경우는 흔치 않다. 시라/쉬라즈는 카베르네 소비뇽, 메를로, 템프라니요에 이어 네 번째로 많이 재배하는 양조용 적포도 품종으로, 그 재배 면적은 점점 더 증가하는 추세다. 그런데 왜 다른 품종들과 달리 두 개의 이름으로 불리게 된 걸까? 아마도 시라/쉬라즈가 명백히 대조적인 두 가지 스타일, '단단하고 절제된 프랑스 론 밸리 스타일'과 '농밀하고 화려한 남호주 스타일'로 진화했기 때문일 것이다. 일반화해서 말하자면, 프랑스 론 밸리를 따라 재배되는 '시라'는 레드 베리 풍미와 함께 올리브와 시원한 허브, 후추 향이 어우러지는 견고하고 드라이한 스타일이다. 반면 바로사 밸리로 대표되는 남호주의 따뜻한 기후에서 완숙한 '쉬라즈'는 잼과 같이 진한 검은 과일 풍미에 다크 초콜릿의 감미로움과 톡 쏘는 후추향이 더해져 과일 맛이 넘치는 풍만한 스타일이다. 지역적으로 봐도 구세계와 신세계, 그리고 북반구와 남반구의 흥미진진한 대립각이 세워진다. 하지만 와인의 세계는 그렇게 단순화하기에는 너무나도 복잡하다. 시라/쉬라즈는 다양한 지역에 잘 적응하며, 해당 지역의 테루아를 잘 표현하는 미덕을 지녔기 때문이다. 칠레, 미국, 아르헨티나, 이탈리아, 스페인, 남아공 등 세계 각지에서 다양한 스타일의 시라/쉬라즈 와인이 생산되고 있으며, 이들 와인들을 위의 두 기준으로 무 자르듯 가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국가와 지역, 그리고 레이블에 품종 이름을 어떻게 표기했는지에 따라 생산자가 추구하는 와인 스타일을 어느 정도 가늠해 볼 수 있을 뿐이다.
품종의 기원
시라/쉬라즈 품종은 오래전부터 프랑스 론 밸리에서 재배되어 왔지만 그 기원에 대해서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품종과 이름이 같은 페르시아(현재의 이란) 도시 쉬라즈로부터 전해진 것이라는 전설이 여럿 있었다. 대표적인 두 가지 설은 기원전 600년쯤 그리스 식민지였던 마르세이유를 통해 론 밸리로 유입되었다는 이야기와, 13세기 십자군 원정에서 돌아온 기사가 북부 론의 탱(Tain) 마을에 은둔하면서 가지고 들어왔다는 이야기다. 탱은 현재 최고의 시라 와인을 생산하는 에르미타주(Hermitage)가 위치한 마을인데, '에르미타주'의 뜻이 은둔자이므로 AOC의 이름부터 위 전설에 기반을 둔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또 다른 전설은 지중해 시칠리아 섬의 도시 시라쿠사(Syracuse)로부터 로마 황제 프로부스가 가져왔다는 이야기인데, 이 역시 근거는 부족하다.
오히려 근래의 DNA 분석은 시라/쉬라즈 품종이 론 밸리 부근에서 자생했음을 가리키고 있다. 시라/쉬라즈 품종은 론 지역의 적포도 품종 뒤레자(Dureza)와 사부아(Savoie)의 백포도 품종 몽되즈 블랑슈(Mondeuse blanche)의 자손이라는 것이다. 두 품종 모두 큰 인기를 얻은 적이 없으며 론 부근에서만 한정적으로 재배되던 품종이므로, 시라/쉬라즈 품종이 북부 론에서 기원했다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시라/쉬라즈 품종의 발생 시기와 언제부터 본격적으로 재배되기 시작했는지는 여전히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시라/쉬라즈의 명성이 시작된 곳은 확실하다. '에르미타주'다. 13세기 은둔자의 전설이 시작된 이래, 에르미타주는 수 세기 동안 힘 있고 진한 풍미의 와인으로 높은 인기를 누려 왔다. 특히 18-19세기에는 해외에서도 높은 평가를 얻었으며, 토머스 제퍼슨 같은 와인 애호가들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특히 그 시기 보르도 와인들이 색과 풍미를 강화하기 위해 에르미타주를 섞었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물론 원산지 통제 명칭(AOC) 제도가 확립되기 이전의 일이지만. 마고의 이름 높은 그랑 크뤼 클라세 샤토 팔머(Chateau Palmer)는 그때의 스타일을 재현한 히스토리컬 19세기 블렌드 와인(Historical XIXth Century Blend Wine)을 출시하기도 했다.
19세기는 시라/쉬라즈에게 또 다른 기회를 만들어 준 시기이기도 하다. 1831년 영국인 제임스 버스비(James Busby)는 유럽의 포도 품종들을 수집해 시드니 식물원과 헌터 밸리 지역에 심었다. 이로부터 남호주 지역으로 퍼진 시라/쉬라즈는 1860년대에 이르러 주요 품종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얻게 될 남호주 쉬라즈의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이때 식재된 포도나무의 일부는 아직까지 살아남아 복합적이고 밀도 높은 와인을 생산하는 올드바인이 되었다.
호주 '쉬라즈'
시라/쉬라즈의 고향은 프랑스 론 지역이지만 한국에서는 호주의 쉬라즈가 좀 더 폭넓은 인기를 누리고 있는 것 같다. 아마도 입안을 부드럽게 감싸는 질감과 농밀한 과일 풍미가 친근하게 다가오는 것 아닐까. 마트 등에서 비교적 손쉽게 구할 수 있고, 레이블만 보고 쉽게 고를 수 있는 것도 하나의 요인일 것이다.
호주 쉬라즈를 세 개의 키워드로 정의한다면 '검은 과일', '유칼립투스', 그리고 '후추'다. 잘 익은 블랙베리와 블랙체리, 블루베리, 프룬 등의 농익은 검은 과일 풍미는 (종종 오크 숙성을 통해) 다크 초콜릿이나 모카, 바닐라 풍미와 어우러져 농밀하고 부드러우며 따뜻한 인상을 만들어낸다. 상쾌한 유칼립투스와 민트 향기는 진한 와인에 신선한 매력을 더한다. 그리고 톡 쏘는 후추는 호주 쉬라즈의 정체성을 만드는 데 빼놓을 수 없는 특징이다. 이런 세 가지 특징 덕에 쉬라즈는 풍미가 짙은 육류 요리나 바비큐와 환상적인 궁합을 이룬다.
바로사 밸리와 이든 밸리, 맥라렌 베일, 클레어 밸리는 수준급 남호주 쉬라즈를 생산하는 지역이다. 펜폴즈 그레인지, 헨시케 힐 오브 그레이스, 토브렉 런 릭 등 세계적인 프리미엄 와인들이 이들 지역에서 탄생했다. 이외에 쿠나와라는 민트와 후추 향이 더욱 잘 드러나는 절제된 스타일의 와인을 만든다. 좀 더 서늘한 지역인 빅토리아의 야라 밸리 등에서는 프랑스 론 밸리와 유사하지만 더욱 간결한 스타일을 생산한다. 뉴 사우스 웨일스의 헌터 밸리는 좀 더 살집이 있으며, 서호주는 균형감이 좋고 단정하다.
최근에는 스파클링 쉬라즈도 각광받고 있다.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호주만의 독창적인 스타일로 병에서 2차 발효를 하는 전통 방식으로 생산한다. 로제 스파클링이 아니다. '레드 스파클링'이다. 쉬라즈의 성격이 명확히 살아 있어 묵직하고 검붉은 과일 맛이 진하게 드러난다. 버블을 타고 피어나는 검은 베리와 체리, 자두, 다크 초콜릿 풍미의 독특한 매력을 즐겨 보자.
프랑스
프랑스에서 시라는 20세기 중반까지 긴 침체기를 겪었다. 1960년대 말까지 프랑스 전역에 시라가 심어진 밭은 2,700ha에 불과했을 정도. 하지만 1970년대부터 론 지역이 다시 주목받기 시작하면서 시라의 인기는 점점 상승하기 시작했다. 특히 로버트 파커의 호평은 결정적이었다. 그는 론 지역의 주요 와인에 연속적으로 100점을 매기며 불붙은 인기에 기름을 부었다. 대표적인 예가 애호가들 사이에 '라, 라, 라'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이 기갈의 코트 로티 싱글 빈야드 시리즈 '라 물린', '라 랑돈', '라 튀르크'. 이런 인기에 힘입어 현재 프랑스에 시라가 식재된 포도밭은 64,000ha를 넘어섰으며, 세계에서 가장 넓은 쉬라즈 포도밭을 보유하게 되었다.
북부 론은 시라의 고향인 만큼 시라 와인 스타일의 표준이 되어 왔다. 원산지 통제 명칭을 받은 북부 론 레드 와인에 사용하는 적포도 품종은 시라가 유일하다. 다만 약간의 청포도 블렌딩이 허용되는데, 최근에는 점점 시라 100%로 만드는 추세다. 북부 론의 시라는 촘촘한 타닌과 깔끔한 산미가 이루는 견고한 구조와 섬세하면서도 분명한 풍미가 일품이다. 북부 론을 대표하는 두 산지는 북쪽의 꼬뜨 로티와 남쪽의 에르미타주. 둘 사이의 거리는 60km 정도밖에 안 되지만 스타일은 완연히 다르다. 코트 로티는 향긋하고 섬세하며 우아한 반면, 에르미타주는 강건하고 단단하며 비교적 묵직하다. 어쨌거나 둘 다 최고의 인기와 명성, 높은 가격을 형성하고 있음은 확실하다. 이외에 코르나스는 북부 론에서 가장 짙은 컬러와 강한 타닌, 묵직한 과일 풍미를 지닌 와인이다. 과거에는 투박한 와인이라는 인식도 있었으나, 최근 그 인기가 폭등하고 있다. 크로즈 에르미타주와 생 조셉은 보통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와인을 만들지만, 잘 고른다면 보석 같은 와인들도 만날 수 있다.
이외에 프랑스 남부에서는 시라를 주로 블렌딩용으로 활용한다. 시라의 역할은 주로 와인에 단단한 골격과 고급스러움을 형성하는 것. 때문에 남부 론을 비롯한 랑그독 루시옹, 프로방스 등 광범위한 지역에서 폭넓게 재배하고 있다. 물론 메인 품종으로 쓰이거나, 단독으로도 훌륭한 퍼포먼스를 내는 경우가 많다. 로제 와인 양조에도 사용되니, 여러 모로 다재다능한 매력적인 품종임이 확실하다.
기타 국가
시라/쉬라즈는 세계적으로 그 재배면적이 증가하고 있는 품종이다. 전 세계 애호가와 생산자들의 인기를 두루 얻고 있다는 얘기다. 최근 칠레 시라/쉬라즈의 품질이 많이 향상됐다는 평가가 많이 보인다. 1990년대 몬테스에서 처음 시라를 심었을 때 주변으로부터 '어리석다'는 핀잔을 들었다는 말을 떠올리면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아르헨티나는 칠레보다 좀 더 일찍 시라/쉬라즈로 성공을 거두었고 재배면적 또한 더 넓다. 한국에는 상대적으로 많이 소개되지 않아 아쉽지만, 수입된 와인들의 품질은 높다. 미국 또한 시라/쉬라즈의 인기가 점점 더 오르는 추세다. 미국의 시라/쉬라즈는 지역 별로 스타일의 차이가 크지만, 일반적으로 북부 론의 절제된 스타일에 가까우면서도 호주 쉬라즈의 부드럽고 풍부한 과일맛을 겸비하고 있어 주목할 만하다.
유럽에서도 스페인과 오스트리아, 포르투갈, 이탈리아 등지에서 질 좋은 시라를 생산하고 있다. 한국에 수입된 것은 보통 드라이하고 단단한 골격을 지닌 힘 있는 스타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