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0일
띠리릭.
현관문이 열리면 나는 시간을 확인한다.
'음, 둘째군.'
"엄마, 엄마! 오늘 수업시간에..."
책가방도 내리지 않고, 신발도 아직 벗지 않은 채로 학교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쏟아내기 바쁘다.
"가방부터 내려..."
"응, 근데 수업시간에 두 가지 주장 중에 하나를 골라서 자기 생각 말하기가 있었는데, 나는 반대를 골라서 발표를 했거든?"
"손 씻고 와서 말해..."
"응, 근데... 발표한 사람 중에 잘한 친구한테 투표를 하는데..."
손을 씻으면서도 말하기는 절대 멈추는 법이 없다.
친구들한테서 많은 표를 받았다며 신이 난 얼굴이다.
"... 그래서 나 잘했지?"
아이는 까만 포도알 같은 눈으로 빨리 칭찬해 달라는 텔레파시를 보낸다.
그 눈에 보이는 사랑스러움에 종종 다리가 허물어질 것만 같다.
원하는 대로 "응, 잘했어."라고 답하면 "그치!"하고 뿌듯한 얼굴로 웃으며 간식을 먹는다.
이게 초등 6학년 여자아이의 긴 하교 인사다.
그럼, 고1 여자아이의 하교 인사를 들여다보자.
"아니, 미친, 진짜 레알 오늘 체육시간에 다른 반이랑 게임을 하는데 주심 서기로 한애가 안 오는 거야! 근데 아파서 빠진 것도 아니고... 어쩌고 저쩌고... 진짜 애들이 다 빡쳐가지고!"
고1은 보통 자기 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고 다른 차원으로 빠진다고들 하는데, 우리 집은 아직 이쪽 세계에 살고 계신다.
'아니'와 '미친'과 '레알'은 세트다.
중학교때와는 다르게 고등학교에서 만난 친구들은 이제 어딘가 어른스러워 함부로 험담도 하지 않고 대화가 즐겁다고, 학교 가는 게 너무 좋다고 한다.
단, 일찍 일어나야 하는 것과 공부해야 하는 것만 빼고.
학교에 적응도 잘하고 친구도 잘 사귀니 더없이 감사할 따름이다.
다만, 오늘은 아침에 열이난 채로 등교를 했는데 귀가시간도 늦어져 걱정이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었다.
첫째 아이는 방송반이다.
하필 다른 학교와 합동으로 영상 촬영을 하기로 한 날이라 늦어지고 있었다.
어릴 때는 열이 나면 그 즉시 소아과로 달려가기 바빴는데 이제는 다르다.
목이 아프거나 콧물이 나거나 뭔가 다른 증상이 있어야 병원에서도 그에 맞는 처방을 하지, 열만 나거나 몸살기운이 있는 것만으로는 어차피 진통제 처방이 전부다.
독감이나 코로나 검사도 열이 난 지 24시간은 지나야 의미가 있다.
잔병치레가 잦고 유행하는 병은 빼놓지 않고 걸리던 첫째 아이 덕분에 경험으로 터득하게 된 상식이다.
그래서 아침에 38도가 넘었지만 그냥 진통제를 먹여서 보냈다.
결석을 하는 게 어떠냐, 아니면 선생님께 말씀드릴테니 오전에 쉬고 지각하는 게 어떠냐고 했지만 아이는 거절했다.
"생기부에 '지각' 찍히기 싫어."가 이유였다.
나는 반박할 말이 없었다.
무서운 생기부...
저녁밥시간이 지나가는데 집에 오지도 않고 전화까지 받지 않아 톡을 보냈다.
[무사한지 톡 한 줄이라도 보내라. 걱정되니까.]
[ㅆㅇ버거 먹고 있어요. 연락 늦어서 죄송해요.]
[지켜본다!]
8시가 넘어 집에 온 아이에게 한번 더 당부를 했다.
"엄마 무섭단 말이야. 누가 우리 아기 집어가면 어떡해... 연락은 꼭 해. 알았지?"
그렇다, 나는 아직 고1아이에게도 아기라고 부른다.
남편은 늘 "우리 집에 아기가 어디 있어!"라고 하지만, 분명 아기들이다.
나보다 키가 큰 아기들. 내 아기들.
"네. 근데 아침에 말씀드렸는데... 오늘 저녁 8시에 온다고..."
"...... 그래?"
갈수록 건망증이 심해 큰일이다.
아픈 몸으로 평소보다 많은 스케줄을 소화한 큰애는 힘없이 의자에 기대앉아 입을 열었다.
"오늘 같이 촬영 끝나고 다들 첫인상 이야기를 하는데..."
원래대로라면 '아니 미친'으로 시작해야 하는데 아파서 도입부가 달라졌다.
아프면 얼른 씻고 자면 될 것을 반쯤 감긴 눈으로 겨우 이야기를 한다.
아파도 엄마한테 말을 해야만 하나보다.
띠리릭.
남편이 이른 초저녁 집에 들어왔다.
1박 2일 출장을 다녀온 길이다.
출장 간 곳에서 싸게 판다고 양념갈비를 사 왔다.
현관 앞에 고기를 내려놓고 다시 나가봐야 한다고 돌아선다.
"그냥 갈 거야?"
돌아서는 남편의 뒤통수에 대고 한마디를 했다.
멈칫.
남편은 잡았던 현관문을 놓고 돌아와 내 뒷목을 잡고 입을 맞추고 다시 나갔다.
나는 멍하니 꼭두각시처럼 한 손을 천천히 흔들며,
"다녀와요..."라고 인사를 했다.
사실, 내 말은...
고기만 두고 가는 거냐, 저녁밥은 집에서 안 먹냐, 다른 짐(빨래)은 없냐, 얘기할 시간도 없이 바쁘냐.. 등등이었는데.
'그냥 갈 거냐'는 말을 듣고 대체 무슨 생각을 한 것일까.
17년 결혼생활로 터득한 남편의 생존전략인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