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
할머니는 고개를 저었다.
"정비사 양반, 여그가 어디요?"
"... 저승 아닙니까..."
"그려, 여그는 저승 버스요. 여그 버스에 타블믄 인자 뭣허고 있겄소? 이놈 저놈 비슷비슷한 것이... 지 인생 돌아보는 놈, 슬퍼서 우는 놈, 무서워서 떠는 놈들이 천지제."
할머니는 손에 들린 뜨개실 바늘을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
"근디, 가는 내내 그러고 있으믄 뭣이 나오냐 이 말이여 내 말은. 인자 이짝으로 넘어와브렀응게 여그서는 저짝에 있을 때 맹키로 돈 벌 필요도 없고, 노무꺼 뺏을 필요도 없제라. 글믄 뭣을 해야 쓰것소? 나는 질질 짜고 있는 것도, 저라고 시끄럽게 노는 것도 못하것소."
잠시 목소리가 커졌던 할머니는 말을 멈춘 뒤, 뜨개질바늘과 실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나는... 그냥 뭐라도 할라고 그러요. 암것도 아닌 거라도 뭘 해야제. 뭐라도 해야 내가 살아있는 거 안 같겄소? 이미 죽어브렀응게 살아있는 것은 아니긴 헌디... 여하튼, 인생 끝났다고 멈춰블믄 그것이 시체랑 뭣이 다르다요? 손이라도 놀려야 내가 여그 있구나... 하는 것이제."
고개를 든 할머니는 윤식과 눈이 마주쳤다.
그 눈은 마치 윤식을 꿰뚫어 보고 있는 듯, 깊고 단단해 보였다.
윤식은 골똘히 생각에 빠졌다.
꼭 돈벌이가 아니더라도 즐거운 일을 할 것을.
좋아했던 낚시라도 할 것을.
그랬다면 더 오래,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웃을 수 있었을까?
아니, 아니지.
보람도 없고, 얻는 것도 없이 그저 즐겁기만 하면 된다고?
그저 유흥만 쫓으면 되는 거였을까?
정답이 무엇인지...
답을 내릴 수 없어 찜찜했다.
닿을 듯 닿지 않는 그 진리를 알고 싶었다.
그리고 어르신의 말씀이 마음에 울렸다.
이제는 알 것 같다.
정답은 없다.
무기력도, 방종도 정답이 아니었다.
내가 부끄럽지 않게 나만의 방식으로 살아내는 것.
무어라도 하고 있는 것이 할머니가 살아내는 방식이었듯, 나 스스로 그 값어치를 인정할 수 있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시시각각 변하는 윤식의 표정을 살피던 할머니는 그의 사색을 방해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차사 양반, 미안헌디... 아까 실 더 있다고 했제?"
할머니는 젊은 차사에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예, 많이 있어요. 의자 커버 만들어 주신다고 하셔서 구해왔는데 제가 가늠을 잘 못해서... 너무 많이 가져와 버렸죠...?"
"아니여, 잘혔어. 안 심심하고 얼마나 좋아."
할머니는 의자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폈다.
"읏차...!"
때마침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제 손전등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어디보자... 카바는 다 맹글었고... 인자 뭐 만드까?"
뜨개질바늘을 손에 쥔 채 웃고있는 할머니의 반짝이는 눈은 마치 신이 난 소녀처럼 보였다.
생각을 정리한 윤식은 차사에게 실을 받고 있는 할머니를 보며 일단 이 미성숙한 망자들부터 조용히 시켜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버스에 오른 윤식은 춤추는 망자들을 보며 숨을 한껏 들이쉬었다.
"야이, 속 창알 머리 없는 것들아!"
뒤이어 핸들의 경적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빠아아아앙!
윤식은 목청 큰 것으로는 자신이 있었다.
시끄러운 정비소에서는 소리쳐 말을 해야 들을 수 있었다.
잘할 수 있는 일이었다.
목청 껏 소리쳐 이 정신 나간 망자들의 주의를 끄는 것.
"뒤졌으면 곱게 갈 것이지, 이게 뭔 지랄이야! 조용히 안 해?"
그들의 눈이 커진다.
거칠게 나가는 말에 죽자고 달려들겠지.
이쯤에서 다른 무기가 필요하다.
윤식은 손에 있던 오일통과 라이터를 들어 올렸다.
"니들 조용히 안 하믄 다 불 살라버릴라니까 그런 줄 알어! 어디 귀신은 불에 타나 안타나 두고 보자!"
- 이놈의 집구석 확 불 질러블 든가...!
언젠가 부부싸움 끝에 했던 말이 떠오른다.
그럴 마음도, 배짱도 없는 놈이었으면서...
홧김에 뱉어낸 텅 빈 말이었다.
홧김이어도 그러면 안 됐다.
뒤늦은 후회가 밀려와 목구멍이 뜨거웠다.
망자들도 생전에 불에 대해서는 공포심이 각인되어 있는 터라, 라이터와 기름 앞에서 위축되었다.
물론 오일통에 있는 것은 오일이 아닌 수돗물이었다.
주춤하는 망자들을 두고 윤식은 말을 이었다.
"이러고 협박을 해야 말을 듣소? 차사가 좋게 말할 때 들으믄 오죽 좋소?"
"가... 갑자기 어디서 나타나서는...!"
"저게 뭔, 말이여, 방구여?"
라이터를 뺏으러 앞으로 나올까 말까 주춤거리는 망자들을 보며 윤식은 얼른 말을 덧붙였다.
"이 속없는 양반들아, 여그 바깥에 할머니 좀 보시요. 저 조막만 한 몸으로 뭐라도 맹글고 게십디다. 그게 뭔 줄 아시요? 여그 버스 의자 카바 만든다고 합디다. 망자들이 버스 타서 이삐라고 만든다 안하요! 이 많은 것을 혼자 만드셨당게요! 누가 시키도 안 했는디... 근디 그 옆에서 시끄럽게 노래 부르고 춤춰서 버스 가는데 방해하믄 쓰것소?"
그제야 망자들의 시선이 버스 밖, 할머니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수북하게 쌓인 의자 커버 옆에 앉아 알 수 없는 무엇인가를 묵묵히 만들고 있었다.
망자들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굴러가기 시작했다.
'다행히 아예 말이 안 먹히는 막캥이는 아니구먼...'
노는 것에 정신이 팔린 그들도 할머니가 작은 손으로 만든 결과물에 시선을 빼앗겼다.
보는 사람이 누구든 마음이 움직일 만큼 정성스럽고 어여쁜 뜨개질 완성품이었다.
눈을 떼기가 힘들었다.
그만큼 그녀가 만든 색실의 조합이 참 고왔다.
거북하고 어둡기만 한 이 버스가 알록달록한 의자 커버를 입으면 너무나도 예쁜 버스가 될 것이다.
저승으로 간다는 두려움을 감싸줄 만큼.
"우리가...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가만히라도 있읍시다. 노래든 춤이든 버스 도착하믄 그때 허시요. 요새 누가 버스에서 위험하게 춤춘다요?"
마지막에 덧붙인 말은 하지 말 것을 그랬다.
그 때문에 죽은 망자들인데...
바로 그때, 윤식의 옆으로 할머니와 차사가 돌아왔다.
"아따, 정비사 양반 좀 비키시요, 지나가게. 뭔 드럼통을 갖고 와갖고 혼자 난리여?"
윤식이 머리를 긁적이며 머쓱해하자 운전사가 윤식의 등을 두드리며 목인사를 했다.
고생했다는, 고맙다는 뜻이리라.
"아, 그러고 거 정비사 양반 타고 온 버스에 고양이 있더만. 그놈 주시요."
별 것 아니라는 듯 그녀가 툭 내민 것을 받아 들었다.
방석이었다.
네모난 모양의 방석은 네 면이 직각으로 올라와 마치 상자처럼 속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이거는 또 언제 만드셨대...? 너무 고와갖고 어떻게 쓴다요..."
"어떻게 쓰기는... 고양이 궁둥이 밑에 넣어주랑께?"
할머니의 시니컬한 대답에 헛웃음이 터져나온 윤식은 감사하다는 인사를 반복했다.
그는 의자 커버를 함께 씌워주려고 했지만 그의 손길은 굳이 필요하지 않았다.
춤추던 망자들도 나서서 도와주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버스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화사하고 특별한 저승 버스가 되었다.
"이거 다른 버스에도 건의를 좀 해봐야겠는데...?"
운전사가 차사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그러게요... 이렇게 귀여울 줄은 몰랐어요."
정작 할머니는 또 열심히 뜨개질에 몰두하고 있었지만 의자의 변화만으로 망자들의 표정이 전혀 달라져 있었다.
윤식은 땅콩이의 방석을 한 손에 들고 그들과 인사를 했다.
차사와 운전사가 손을 흔들었다.
할머니는 어서 가라는 손짓만 몇 번 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버스를 보낸 윤식은 떠오르는 해를 바라봤다.
어느새 그의 곁에 땅콩이가 와 있었다.
윤식의 얼굴이 붉은 햇살에 물들었다.
나도 뭐라도 해 볼까?
그 어르신처럼...
하다못해 춤추고 놀던 그 관광객처럼...
내가 안 해서 그렇지, 한다고 마음만 먹으면 꾸준히 하는 놈이다.
심지어 담배도 끊은 인간이다.
윤식은 의욕이 샘솟았다.
그것은 얼마만인지 헤아려 볼 수도 없을 정도로 오랜만의 일이다.
죽지 못해해야만 하는, 할 수밖에 없는 그런 삶으로 마무리 지었는데 저승 버스를 타고서야 의욕이 샘솟다니.
참 우스운 일이다.
"이제... 뭐라도 하러 가보자."
윤식의 눈가가 보기 좋게 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