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짝이는 여수 밤바다

익숙한 곳으로 떠나는 새로운 여행

by 윙글

10월 18,19일


여행의 시작


이번 여행의 시작은 회였다.


언젠가 머나먼 옛날, 남편과 여수에서 먹었던 줄돔회.

그 싱싱한 회 맛을 보고서야 나는 비로소 초장을 버리고 회를 간장에 찍어먹기 시작했다.


씹을수록 고소한 그 맛이란...!

도시의 횟집에서 느낄 수 없는 맛이었다.


그 맛을 종종 맛보고 싶다, 노래를 불렀건만 이상하게도 여수에 가는 일이 쉽지 않았다.

그리고 브런치에서 팔레오 작가님의 회사진을 부러움의 눈으로 보기를 며칠, 나는 기나긴 시간 담아두었던 한을 풀겠노라 선언했다.


"우리 회 먹으러 여수 가자! 거부는 거부한다."

항상 가족모두의 의견을 수렴해 여행일정과 장소를 정하던 것과 달리, 이번 여행에 있어서 나는 독재자였다.

중요한 일정이 없는 날짜를 골라 일방적으로 숙박을 예약했다.


다행히 그 누구도 반대하지 않았다.

확고한 나의 눈빛을 읽었던가 보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 우리는 그 줄돔을 맛보러 여수에 왔다.



뽀로로낚싯대의 위력


큰애는 어릴 때부터 회를 좋아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시댁 식구들과 바닷가로 여행을 간 어느 날, 자연산 회를 맛본 후부터는 어린 자식이 벌써 회에 눈을 떠버린 것이다.


그리고 덩달아 낚시에도 눈을 뜬 우리 아이는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어마어마한 일을 행하였으니...

장난감 뽀로로 낚싯대로 물고기를 낚아버린 것이다.


그저 바닷가 방파제에 앉아 낚시하는 어른들 곁에서 심심하지 말라고 뽀로로낚싯대 끝에 미끼와 낚싯줄을 꿰어줬는데 지 팔뚝만 한 농어를 낚아 올렸다.


온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보고도 믿을 수 없고 듣고도 믿을 수 없었으나, 농어의 회 맛을 보고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경사로와 계단


그런 연유로 우리는 회를 사랑하는 두 여자의 소원풀이 겸, 여수에 왔다.

그러나 회만 먹고 갈 수는 없는 일.

오랜만에 향일암에 오르기로 했다.


주차를 하고 경사로를 올려다보니 그제야 기억이 났다.

아... 여기는 계단을 오르기 전부터 완전 급경사 오르막이었는데...


시작부터 쉽지 않다.

아니나 다를까, 아이들의 표정이 굳어져간다.

금방 올라갈 수 있다고 아이들을 타이르며 급경사를 올랐더니, 그 끝에 우리를 맞이한 것은 길고 긴 계단.


"여기... 꼭 올라가야 돼?"

큰애가 계단을 보며 물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가?"

'아가야, 엄마가 마음을 먹은 이상 애초에 돌아간다는 선택지는 없단다.'

마음을 굳게 먹고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얼마 가지도 않았는데 슬슬 땀이 나고 숨이 차기 시작했다.

사실 우리 가족 중 가장 체력이 나쁜 사람은 바로 나다.

우습게도 여기에 오자고 고집부린 나.


헥헥...

힘겹게 계단을 오르니 귀여운(?) 불상들이 중간중간에 보인다.

사실 그 불상들은 각자 심오한 뜻을 품고 있지만, 내게는 그저 계단을 오르는 이들에게 하이파이브와 함께 응원을 해주는 귀여운 응원팀이었다.


가쁜 숨을 뱉으며 드디어 계단 끝에 오르니 좁디좁은 바위 사이의 길이 보였다.

그래, 이 길이다.

이 길을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어 이곳을 찾아온 것이었다.


거대한 바위틈새를 지나는 기분은 어쩐지 모험가의 길을 걸어가는 듯, 용이 사는 동굴로 들어가는 듯, 그 느낌이 신비로웠다.


"우와!"

처음 보는 자연경관에 놀라는 둘째와,


"치마 입고 올걸... 인스타 각인데..."

라며 아쉬워하는 첫째는 역시 감상도 다르다.


땀을 닦으며 정상에 올라 물을 마시고 풍경을 감상했다.

그때 펼쳐지는 광경은...

정말이지...

힘들었다...

헥헥...

오랜만에 뻥 뚫리는 시원한 전경이었지만 너무 오랜만에 움직인 탓에 내려오는 길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진정시키느라 바빴다.



줄돔과 낙지와 새우


이렇게 힘든 만큼 회는 맛있겠지?

드디어 우리 여행의 목적인 회를 먹으러 수산시장에 왔다.

우리는 싱싱한 먹이들을 둘러본 후 남편과 눈이 마주친 운 나쁜 물고기가 있는 곳에서 줄돔과 낙지탕탕이, 새우찜을 시키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낙지와 회는 따로 가져다준다고 해서 새우가 들어있는 봉지만 들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식당으로 올라가는 길에 봉지 안에서 새우가 파닥거리는 소리가 났다.

정말 싱싱하구나...

알겠으니, 미안하지만 이제 좀 조용히 해주겠니...


새우를 식당 주방에 넘기고 창가자리에 앉아 기다렸다.

금세 반찬이 깔리고 낙지탕탕이가 나왔다.

뒤이어 윤기가 반지르르한 줄돔회가 나오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새우가 크게 한 접시 나오면서 경이로운 식탁이 완성되었다.


회를 바라보는 첫째 아이와 나의 눈은 이글거렸다.

남편이 뜨거운 새우껍질을 까는 동안 우리는 회를 한점 집어 들었다.

고추냉이를 푼 간장에 회를 찍어 입으로 가져가는 그 순간, 입안에서 펼쳐지는 그 고소함과 쫀득함이란!


"니들 엄마가 그렇게 노래를 부르던 여수 줄돔이다. 맛있게 먹어라."

남편이 흐뭇한 얼굴로 말했다.


"아니, 이제는 내가 그 노래를 부르게 될 것 같아."

이어지는 첫째 아이의 말에 남편과 나의 웃음이 터져 나왔다.


첫째 아이는 산 낙지도, 회도 그 맛을 음미하며 한점, 한점 정성스럽게 오물거렸다.




반짝이는 여수 밤바다


매운탕까지 남김없이 해치운 우리는 두둑하게 채운 배를 꺼트릴 겸, 바닷가에 둘러진 데크 위를 걸었다.

시원한 밤바람이 불어오고 멀리서 불꽃놀이가 이어지고 화려한 유람선이 지나갔다.

광장에서 버스킹 노래가 흘러나오고 포장마차마다 맛있는 냄새와 반짝이는 알전구 불빛이 흘러나왔다.


술을 한잔 마셔도 좋을 곳이었지만 우리는 술 대신 아이스크림을 선택했다.

호텔방에 앉아 넓은 창밖의 밤바다를 보며 구슬 아이스크림을 떠먹었다.

입안에는 달콤함이 녹아내리고 눈앞에는 반짝이는 바다가 펼쳐져 있었으며 엉덩이 밑에는 푹신한 호텔 침구가 깔려있었다.


여수의 밤바다는 오래된 나의 기억보다 더 반짝거리고 있었다.


...라고 생각했으나, 그날밤 나는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남편의 코에서 탱크가 지나다녔기 때문에...


아침에 일어난 나는 거의 좀비에 가까운 상태였다.

"우리... 다음 여행에는 방을 따로 잡을까?"


다크서클을 주렁주렁 매단 채 내뱉는 나의 농담에 남편이 그러자고 호응해 주었다.

푹 잔 덕인지 남편의 얼굴은 상쾌해 보였다.

그래... 누구라도 잘 잤으면 된 거지.




인스타 사진은 못 참아


호텔에서 나온 후 유명한 맛집에서 김밥을 포장해 바닷가 벤치에 앉아 갓김치콩나물국과 함께 여유로운 아침을 즐겼다.

바닷바람을 맞으며 먹는 김밥은 생각보다 느끼했지만 칼칼한 갓김치콩나물국이 어우러지면서 조화를 이루었다.

배가 부르니 디저트를 먹어야지.


우리는 유명한 카페에 들렀다.

숲의 끝자락에 위치한 카페는 내부도 멋스러웠지만 정원이 너무나 잘 꾸며져 있어 구경할 것이 많았다.


또 카페 주인이 기르는 개가 한 마리 돌아다녔는데 사람들을 잘 따르는 순한 아이였다.

손님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

우리 아이들도 조심스레 다가가 살살 쓰다듬고 사진을 찍었다.


카페는 내부도 외부도 개마저도 예뻤지만 그중 가장 좋았던 것은 따로 있었다.

그건 바로 치마를 입은 큰애의 인스타용 사진이 매우 만족스럽게 나온 것이었다.


아이는 수십 장의 사진 중 가장 예쁘게 나온 것을 골라 인스타에 올렸다.

한창 예쁠 나이라서 내 눈에는 다 예쁜데, 아이 눈에는 그게 아닌가 보다.




오동도


이제 여행의 마지막을 장식해야겠지.

여수에 왔는데 오동도는 가보자.

친구들과 왔던, 남편과 둘이 왔던, 큰애가 아기일 때 왔던 오동도를 다시 찾았다.


여전히 바람이 많이 부는구나.

우리는 긴 방파제 길을 걸으며 차가운 바닷바람을 온몸으로 때려 맞았다.


그리고 또 맞이한 계단.

이번에도 헥헥거리며 올라가는데 남편과 아이들의 농담을 들으니 더 걷기 힘들어졌다.

걷는 내내 웃음이 터졌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은 한참 생뚱맞고 우스꽝스러운 짓을 많이 할 때라서 그러려니 하는데, 남편은 요즘 개그학원에 다니는 것인지 왜 그렇게 웃기는지 모르겠다.

끄윽 끄윽 웃으며 계단과 숲길을 지나 동굴(입구) 구경을 하고, 나오는 길에는 동백열차를 탔다.


가려고 마음먹은 곳, 먹고자 계획했던 것 전부를 이룬 나는 뿌듯한 마음을 안고 차에 올랐다.

돌아오는 길, 행복한 여행을 떠올리며 창밖을 보고자 했지만 나도, 아이들도 마취총을 맞은 것처럼 잠이 들었다.

남편은 그렇게 세 여자의 새근거리는 숨소리를 들으며 홀로 운전을 했다.



익숙하지만 소중한 여행


첫째가 고등학교에 들어간 후 가족 여행을 가는 것이 쉽지 않다.

그래서 더 소중한 여행이었다.


여행 기간이 길지도 않았고 외국을 간 것도 아니다.

그저 가깝고 익숙한 곳으로 떠난 여행이었다,

하지만 아이들이 훌쩍 자라 다시 찾은 여행지는 예전과는 전혀 다른 추억을 남겨주었다.


회를 못 먹던 아이는 회 사달라 노래를 부르게 되었고, 인스타용 사진을 찍는 아이가 되었다.

낯가림으로 외식 한 번을 못하게 하던 아이는 감탄사를 연발하며 호기심 어린 눈으로 뭐든지 해보려고 하는 아이가 되었다.


같은 여행지라도 아이들이 자라면 전혀 다른 여행이 된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겠지.

벌써부터 나는 다음 여행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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